- 초보 직장인의 출구 없는 추억 여행
나에게 올해 5월 1일은 '노동자'로서 맞는 첫 '노동절'이었다. 5월에 휴일이 많으니까 꼭 봄방학을 맞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방학이 없다는 게 너무 슬퍼서 이렇게라도 '방학'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고 싶은 걸까.) 나는 첫 노동절을 자축하며 집 근처 미용실을 찾았다. "학생이세요?" 미용실 직원이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직원은 "그렇죠?"하며 어색하게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상한 머리카락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고 애매한 기분이 나를 감쌌다. 글쎄, 나는 학생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직장인 같지도 않은 걸? 최근 두 달 동안 '직장인'이라는 어색한 단어와 친해지려고 끙끙대는 사이에 시간은 잘도 흘러갔구나.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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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평범한 저녁이었다. 파리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는 친구와 영상통화를 해서일까. 갑자기 교환학생 때, 대학생 때(라고 해보았자 불과 몇 개월전 일이다. 근데 왜 이렇게 아득하게 느껴질까?)의 내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나는 2015년부터 지금까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 차곡차곡 쌓인 구글포토, 일명 추억상자를 클릭했다. 그렇게 출구 없는 추억여행이 시작되었다.
1. 2016.09.14 - 설레는 시작
나는 영국의 플리머스(Plymouth)라는 평온한 바닷가 마을로 교환학생을 갔었다. 교환학생을 가기 전, 이미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들이 교환학생 생활을 한 나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모습이 신기했다. '저 정도일까?' 생각했는데.. 막상 다녀오니 정말 그렇다. 교환학생을 이미 다녀온 친구들이 출국을 앞둔 나를 부러워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젠 정말 이해가 간다. 지금의 나도 2016년 9월의 내가 부러우니까!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일주일 되지 않은 시점에서 찍은 이 사진을 보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비현실적으로 행복했던 그때의 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2. 2016.12.17 - 교환학생 4개월 째
처음으로 혼자 런던 여행을 갔을 때 만난 안개. 마침 이어폰에서는 The Wombats의 노래 'Jump into the fog'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I'm only here because
I want to twist the structure of my average day
나는 단지 여기 있어 왜냐면
평범한 하루의 구조를 비틀고 싶기 때문이야
We feel nothing so jump into the fog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그러니 안개로 뛰어들자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매일이 쳇바퀴처럼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먹는 것이 모두 다르기에 새로움이 주는 에너지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까!
플리머스에서 혼자 새벽 버스를 타고 런던에 도착해서 이 안개와 마주하는 순간, 흥분과 설렘과 걱정이 안개처럼 뒤섞여 일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3. 2016.12.25 - 크리스마스!
하지만 교환학생 생활이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우울할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는 기숙사 방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 그런데도 가끔씩 정말 강렬하게 교환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마냥 자유롭고 행복하진 않았지만 그 사이 사이에 특별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순간'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크리스마스다. 나는 아무도 없는 기숙사에서 외롭게 크리스마스를 보낼 뻔 했지만, 브리스톨에 사는 친구의 초대 덕분에 느긋하고 따뜻한 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친구는 자메이카 출신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친구의 영국 영어도 친구 할머니의 독특한 억양도 나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 영어의 길은 정말 멀고 험난하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두팔 벌려 환영하고 있다는 건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할머니집 근처에 있는 친구의 친척집에 가서 배터지게 크리스마스 음식을 먹었다. 바삭바삭한 요크셔 푸딩, 오븐에 구운 각종 고기와 채소로 몸도 마음도 뜨끈해졌다.
4. 2017.1.2 - 나홀로 포르투갈 여행
여행을 떠나면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나는 내가 혼자 여기저기 정처 없이 걸으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생각보다 나는 용감한 사람이구나, 더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포르토(Porto)는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멋이 있어서 참 좋았다. 정해진 일정 없이 발 닿는대로 걸어다니고 잠시 멈춰 풍경을 감상하며 내면의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 소중했다. 저녁에는 호스텔 거실에서 하루를 돌아보며 일기를 썼다. 차분하고 고요한 그 시간이 좋았다. 나는 포르토에서 '다음엔 가족들과 함께 꼭 와야지'하고 다짐했다. 혼자 여행은 혼자 여행대로 좋았지만, 혼자 누리기에는 넘치도록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기에,
5. 2017.1.25 - 함께 하는 여행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이 사진은 영국의 땅끝마을인 랜즈앤드(Land's End)에서 찍었다. 이번에는 혼자 가지 않고 영국에서 만나 친해진 홍콩 언니와 싱가포르 친구와 함께 갔다. 함께 하는 여행은 웃음으로 채워졌다. 바다와 구름과 어마어마한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린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계속 웃고, 떠들며, 사진 찍고, 뛰어다니며 함께 하는 여행을 즐겼다.
6, 2017.2.11 - 이제는 돌아갈 시간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한국가는 비행기를 탔다. 긴 비행을 견디기 위해 기내에서 와인을 마셨다. 푹 자고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속이 다 뒤집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이 울렁거리고 배도 아파서 너무 힘들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보고 승무원 언니가 진저에일을 건네 주었다. 겨우 살아났다. 박진감 넘치는 비행이었다. 다시 자고 영화 보다가 자는 것을 반복하니 어느새 인천이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아빠와 언니의 얼굴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가 않고 2주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5개월이 2주처럼 흘러갔나보다.
7. 그리고 지금!
2018년 5월 지금, 왜 2016년 이야기를 구구절절 썼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추억에 잠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교환학생 5개월 동안은 매일 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교환학생은 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니까,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라는 생각에서 더 열심히 기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사진도 거의 찍지 않고 일기도 너무 많이 밀려 버렸다. 초보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2년 더 어린 내가 외치는 말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