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기억 중 가장 예쁜 기억을 하나 꼽으라면 갈색 벽돌의 2층 건물 옥상에서의 기억일 것이다.
우리 집은 이 건물 1층에서 비디오 가게를 하고 있었고 우리가 왜 옥상에 올라갔는지 다른 날에도 옥상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는지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지 않는다.
봄날이었고 따뜻했고 무난했던 그냥 평범한 일상 중 하루였다. 중학생쯤 이였을까 아니면 기억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였을까. 기억 속 나는 옥상 위에 올라가 있었고 내 옆에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었다. 우리 그저 눈앞에 멀리 펼쳐진 곳만을 바라보며 있었다. 그 순간 한 조각의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봄날의 바람. 벚꽃을 부르는 바람. 따스함을 품은 바람. 바람에도 색이 있다면 아마 연분홍빛일 것만 같은 그런 바람이 스쳐갔고 난 동생에게 말했다.
" 진아. 이 바람 벚꽃장 바람 같지 않나? " " 맞네. 벚꽃장 바람이네. "
주고받은 하나의 대화만이 기억 속에 가득하다. 나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나만이 정의해 놓은 계절의 한 조각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었던 경험.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의 가장 가까운 이라는 것. 채 1분도 되지 않은 그 시간의 장면을 통째로 움푹 떠서 스노우볼에 넣었다. 동그란 스노우볼은 기억 서랍장 위쪽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도,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봄의 초입에서도 언제든 떠올릴 수 있는 나의 소중한 기억.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계절에 대한 감각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 것이.
정신없는 학창 시절과 쉼 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며 그간 잠시 잊고 지냈던 계절감이 마흔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점점 손끝으로, 눈으로, 양 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있는 듯한 그런 기분을 사랑한다. 매일매일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이 아주 조금씩,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뀌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관찰자로 보내는 시간을 사랑한다. 출근을 하다가도 혹은 지친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다가도 하늘을 바라보고 옷을 바꿔 입는 나뭇잎에게 시선을 돌린다. 꽃망울을 품은 봄바람과 싱그러움을 품은 초여름 바람의 미묘한 차이를 혼자 느끼며 뿌듯해하기도 한다. 가을이 깊어지는 요즘은 붉게 물드는 단풍잎들을 품고 스산해져 가는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그냥 나의 계절이, 우리의 계절이 좋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그 계절이 좋다. 남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그 계절 말이다. 누군가에게 장마철은 인상이 찌푸려지거나 나들이 약속이 걱정되겠지만 여름이니 당연히 지나가야 할 수순 아닐까란 마음만 들뿐이다. 비가 오면 빗방울을 바라보면 되지 않을까. 내리는 비를 보며 내 마음의 먼지들도 씻겨내면 되는 것 아닐까. 시간의 흐름은, 계절의 흐름은 그런 것이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드넓은 존재를 인식하며 그만큼 나의 시야도 넓어지길 바란다. 너른 바다와 황금빛의 들판처럼.
숨을 깊게 내쉬어본다. 그리고 오늘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잡념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하늘빛으로 물들여진다. 그거면 된다. 오늘의 계절을, 11월 어느 하루를 지나가는 나의 계절을 담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