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이지만 그렇지 않다

by 스누즈

집을 나서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만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택시 안. 잠이 서린 눈을 감으려 하는 찰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논, 밭을 지나 작은 언덕 위로 햇살이 내리쬔다. 그곳만 태양빛이 가득했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산소. 비석 하나 없이 서너 개의 묘가 있다. 둥그런 반구가 반짝거린다. 누워계시는 저분들은 참 따뜻한 곳에 계시는구나 싶은.


하늘은 파랗다. 하늘은 높다. 겨울의 하늘은 차갑게 깨끗하고 차갑게 맑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 듯 보이는 저 하늘, 사실은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 점점이 빼곡히. 우리가 내뱉는 모든 단어가, 문장이, 세상 모든 언어가 사실 흩어지는 게 아니라 모습을 감춘 채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겨울이면 살얼음이 낀 채 얼어있는 우리의 말. 경칩이 오기 시작하면 맑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녹을 것이다. 여름엔 한낮의 무더위에 흐물흐물 늘어지지 않을까. 어쩌면 차가운 땅속에 묻힌 이들이 꿈꿨던 것들도 저 파란 허공 속을 떠도는 게 아닐까. 육체가 없어졌다 한들 그들이 품은 것들은 죽지 않을 테니. 누군가의 반짝거리던 청춘의 꿈, 바라던 이상향, 마음속 간절히 품었던 그 모든 것들. 그것들은 죽음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이의 눈엔 보이지 않을 뿐, 가득하다. 파란 하늘, 저기 보이는 겨울의 하늘이 가득하다 우리의 것들로.


청각장애인 아버지를 바라보며 수화를 하는 젊은 아들. 무뚝뚝해 보이는 시골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본다. 혹여나 아들의 말 한마디 놓칠세라 주름 가득한 얼굴로 당신보다 더 커진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은 걱정스럽다. 보호자는 검사실을 따라 들어갈 수 없기에, 자신의 품에서 늙으신 아버지를 잠시 놓아야 하는 아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아버지가 나오길 기다린다. 무뚝뚝해 보이는 두 사람. 아버지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지금처럼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내 귓가를 울리는 수많은 소리들은 저들에게 들리지 않겠지. 침묵의 공간에서 두 손이 일으키는 바람만이 귓가를 스칠 테지. 잠깐 본 두 사람의 눈과 손. 아직까지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냥 오늘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순간임에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것. 눈앞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것들은 아직 눈앞에 남아있다. 오늘의 글감인 마지막 페이지와 관련하여 어떤 연관을 짓고 싶지만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1시간째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나아가지만 여기까지인가 보다. 세상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니깐. 피식 웃음이 나는 어설픈 핑계 하나를 앞세우며 마음속으로만 적어 내려가 본다. 내가 가진 빛들도 언젠간 저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우겠지. 어떤 이에게도 보이진 않겠지만 쉼 없이 빛나고 있을 나의 바람, 꿈, 마음. 나는 그것들을 위해 매일을 아낌없이 살 것이다. 말 한마디 놓치지 않겠다는 늙은 아버지의 눈빛으로.


차가운 겨울의 중심에 몽글몽글해진 마음 하나 놓고 오늘의 글을 마무리한다.

작가의 이전글부서지다 못해 바스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