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던 장마가 다시 찾아왔다. 예보와 어긋난 빗줄기는 짧고 강하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비가 지나간 자리는 무거운 습기로 가득 찼고 덩달아 베란다에 널린 빨래는 마를 생각이 전혀 없이 축축 늘어져 있다. 베란다 한편 건조기가 있지만 축축해져 있는 빨래들을 넣고 싶지는 않다. 손쉬운 기계의 손을 빌릴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엔 항상 옥상이 있었다. 초록색 옷을 입은 넓기도 좁기도 했던 옥상. 지금 내 나이 즈음의 엄마는 항상 상아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막 세탁기에서 꺼낸 옷들을 한가득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린 나는 엄마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간다. 한걸음 두 걸음 조심조심. 엄마는 따사로운 햇살을 등지고 빨래를 힘차게 털어낸다. 팡!! 팡!! 흩날리는 빨랫감을 따라 얇디얇은 물방울들이 내 볼에 드리운다. 눈을 찡긋하게 되는 차가움에 미소가 지어진다. 탄탄한 빨랫줄에 화려한 색상의 집게로 옹기종기 빨래를 널어놓고 엄마는 기지개를 켠다. 나도 금세 팔을 하늘높이 뻗어본다. 젊은 엄마와 어린 나. 그렇게 우리 모녀는 햇살 아래 함께였다.
햇볕 아래 맡겨놓았던 빨래들을 가지러 가는 건 동생과 나의 몫. 상아색 빨래 바구니를 들고 초록색의 옥상으로 올라간다. 한걸음 두 걸음 조심조심. 아침 늘어져있던 옷과 양말들이 어느새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다. 수건에 자그마한 손가락을 뻗어본다. 하늘색의 수건에서 바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그마한 감색의 동생 바지에도 살며시 손을 대본다.
"바삭"
빨래의 목소리가 아닌 햇볕의 목소리. 낮 동안 옥상에 남겨진 빨래에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해의 목소리. 바람을 타며 보았던, 들었던 세상의 이야기들이 햇볕에겐 얼마나 많을까. 햇살 아래 보이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져 빨래에 얼굴을 묻어본다. 빨래가 품은 온기에 노곤노곤해진다. 나도 빨랫줄에 걸려있으면 세상의 이야기들을 햇볕에게 전해 들을 수 있을까? 나에게 속삭여줄까?
난 어떤 것들이 품고 있는 기억을 사랑한다. 그것이 바람이든, 빨래이든. 그것들에게 깃든 추억을 사랑한다. 오늘같이 공기 중 물방울이 가득해 축 늘어진 빨래를 보고 있으니 어린 날 어느 하루 초록의 옥상이 떠오른다. 우리 집 초록색 옥상. 기억 속 옥상으로 한걸음 두 걸음 조심조심 올라가 탄탄한 빨랫줄에 나를 걸어놓고 싶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싶다 대롱대롱 걸린 채로.
쨍하게 마르도록, 바삭하게 마르도록.
햇볕의 이야기를 하루 내도록 듣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