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컴퓨터를 좋아한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서 컴퓨터란 녀석을 한번 만나고는 뿅 가서 주구장창 부모님께 졸라댔던 적이 있다. 컴퓨터가 얼마나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오랜 시간 역설한 끝에 마침내 컴퓨터를 영입했다. 나의 첫 컴퓨터는 삼성 486 데스크톱 컴퓨터였는데 그 당시 20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에도 장남의 기를 살리기 위해 사주셨지만 기대와는 달리 난 그걸로 게임만 해댔다. 그 덕에 컴퓨터를 잘 다룰 수 있게 됐지만 성적이 좋아지진 않았다. 아무튼 그 이후로 우리 집엔 늘 컴퓨터가 있었다. 그 앞엔 주로 내가 앉아 있었고, 가끔은 내 동생이 앉아서 뭔가를 했다. 그러다 나는 직장을 다니게 됐고 어쩌다보니 대학원에도 진학하게 됐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고부터는 도서관에 자주 가야 했는데 수많은 참고서적과 논문집을 빌려 집으로 운반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때부터 난 노트북을 꿈꿨다. 노트북만 있으면 자유롭게 논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큰마음 먹고 노트북을 구입했고 도서관에 앉아 논문을 썼다. 사실 ‘자유롭게’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노트북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노트북도 장시간 쓰려면 전원을 연결할만한 곳에서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키보드 소리 때문에 노트북석이라는 별도의 자리에서 써야 했는데 그 자리는 항상 부족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침부터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도서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던 그 대열에 나도 속해 있었다.
물론 집에 계시는 데스크톱 컴퓨터보다는 자유로웠다. 두꺼운 책들을 대출했다 반납했다 하는 대신 노트북만 들고 다니면 해결되었으니까. 날씨 좋은 날은 학교 벤치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 도서관에 자리가 없는 날은 카페에 앉아 두드렸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열심히 두드려댔지만 논문은 큰 진척이 없었다. 데스크톱 컴퓨터를 쓸 때보다 편해진 건 사실이지만 논문 작업 시간이 늘어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리를 잡거나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느라 더 시간을 허비했던 것 같다. 일정한 속도로 진행되던 나의 논문은 논문제출 마감시한이 다가오자 불이 붙었다. 그 때는 데스크톱이든 노트북이든 가리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논문을 써야 했기에 남는 시간은 모조리 논문 쓰기에 투입되었다. 논문이 완성되고 이런 저런 일을 거쳐 대학원을 졸업했다.
최근에 나는 다시 데스크톱 컴퓨터를 샀다. 노트북의 작은 화면이 답답하기도 하고 옮겨 다니며 글 쓰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집에서 글을 쓸 거면 노트북보단 데스크톱 컴퓨터가 좋다고 생각했다. 컴퓨터를 사고 한동안 광활한 화면과 뛰어난 성능에 감탄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2달쯤 지난 이 시점에서 난 데스크톱 컴퓨터를 방에 놔두고 다른 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데스크톱이냐 노트북이냐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힘들 때마다 이게 데스크톱이냐 노트북이냐는 문제에 매달렸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방식만 바꾸면 해결이 될 줄 알았던 것이다.
노트북처럼 살든 데스크톱처럼 살든 그게 중요하겠는가? 노트북이든 데스크톱이든 하드웨어적인 삶의 방식은 선택의 문제다. 나에게 적합한 걸 선택하면 된다. 무엇이 더 좋고 그걸 선택하면 무조건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떤 컴퓨터를 쓰든지 컴퓨터는 컴퓨터고 그 컴퓨터를 운영하는 운영체제는 대개 비슷하다. 컴퓨터가 빨라지면 운영체제를 가동하는데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실제로 컴퓨터 사양이 올라가면 어느 순간부터는 체감이 되지 않는다. 특별히 게임 같은 걸 하지 않고 인터넷이나 문서 작성할 때는 그렇게 좋은 컴퓨터는 없어도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노트북처럼 자유롭게 1인 기업이나 사업을 하면서 살아도, 데스크톱처럼 붙박이가 되어 조직 속에 살아도 결국 삶은 내가 사는 것이다. 삶의 조건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체감되지 않는다. 그 이후부터는 내가 달라져야 하는 새로운 영역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조건에 맞춰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에겐 CPU가 이렇고 램이 저렇다는 컴퓨터 사양이나 형식이 중요하지만, 조건에 개의치 않는 사람에겐 사용자인 내가 더 중요하다. 우린 결국 비슷한 속도로 살 것이고, 그러다 마감 시한이 임박해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마감 날짜 앞에선 이것도 저것도 다 소용없으며, 그 따위 것 별로 중요치 않음을.
남과 내가 사는 모습이 어떠한가에 집착하면 넘어설 수 없는 게 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우릴 구속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진짜 중요한 그 무엇에 닿는 비결은 넘어섬에 있다. 현실이라는 영역을 넘어 새로운 각성에 눈 뜨라. 우리 삶의 각성에 닿으면 매트릭스에 나오는 ‘네오’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제어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슈퍼 울트라 영웅이 될 지도 모른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문제도 그것을 일으킨 의식 수준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의식을 자유롭게 하고 무엇이 중요한 지 또렷이 알고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며, 넘어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