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봄 그리고 꽃

by 서효봉


바다를 본다. 바닥의 검은 얼룩이 엎어진 잉크처럼 선명하지만 그 위를 출렁이는 물결 때문에 물이 맑음을 안다. 여기가 제주도요 하고 소개하지 않아도 그냥 제주도인 줄 알게 되는 그림. 같은 풍경이 비현실적인 이 곳 월정리. 월정리의 어느 카페. 카페 안 2층. 2층의 테라스. 바다가 바로 보이는 테라스의 의자 위. 고요. 하면 좋겠지만 옆집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풍경은 고요한데 차 지나는 소리, 뭔가 절단하는 소리, 카페 손님들의 수다소리. 소리. 소리. 소리가 줄지어 귀를 통과한다. 이번 제주 여행도 그런 식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쉬겠다며 휴가내고 비행기 타고 온 여행. 새벽에 일어나 조용한 제주도의 풍경을 즐기고 이런 저런 글을 쓰면서 게으르게 굴러다닐 줄 알았더니. 제주도는 갈 곳도 많고, 가야할 곳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 섬이다. 아마 앞으로도 제주도는 그런 섬이지 않을까.



하지만 마지막 날. 잠시 생각의 여유를 즐긴다.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나. 세상의 어느 부분을 위해 매일을 반복하고 탈출을 꿈꾸며 지칠 때까지 나를 괴롭히는가. 남쪽 섬에 온 이유. 대륙의 끝자락이라도 몸통에 속해 산다는 건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다. 뚝 떨어져 나와 내가 살던 곳을 바라보니 왜 그러고 사나 싶다. 아내의 손을 잡고 제주의 숲을 걸으면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왜 그렇게 무심히 살아왔나 싶다. 왜하고 자꾸 물어보면 결국 용기가 없었다든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든지, 그냥 그랬다든지 변명이나 늘어놓을 게 뻔하다. 그러니 이쯤에서 더는 묻지 않겠다. 다만 월정리의 바다. 아니 제주의 바다는 끝내준다. 햇살이 출렁이는 바다. 그건 왜라고 묻지 않아도 따지지 않아도 변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풍경 앞에, 자유로운 바람 곁에 서면 시간의 장벽이 무너진다. 내 뒤로 지나간 기억의 시간, 앞으로 덮쳐올 뭔지 모를 두려움의 시간. 여기서부터 거기까지라 여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냄새도 없고 온기도 느낄 수 없는 이상한 환상. 시간. 그 틀을 깨고 하늘로 날아오르면 그저 지금 이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 뛰는 현재. 살아 있어 다행스러운 존재의 가벼움만 남는다.



곶자왈. 아이들과 이 숲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알았다. 언젠가 다시 여기 올 거라는 걸. 그 예감은 이번 여행에서 실현되었다. 일종의 계시 같은 그 예감이 나를 이끌어 이 섬으로. 이 섬의 숲으로.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그 길을 뱀처럼 지나다녔다. 슬금슬금 그 숲의 어둠. 그러니까 대낮인데도 어둑한 숲의 어둠을 들이마시며 걸었다. 걸으며 어디 가는지는 알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새소리만, 비현실적으로는 나무의 꿈틀거림, 바위를 뚫고 살아온 착한 생명의 심장소리만 들린다. 바스락거리는 숲은 내가 살아 있으니 너도 살아 있다고 말한다. 살아 있으면 그것으로 됐지 뭘 그리 복잡하게 괴롭히냐고 또 한 마디 한다. 그 한 마디를 들으니 억울하다. 열심히 살았는데 괜시리 그러고 있다는 말에 더 억울하다. 억울해서 그냥 할 말을 잃고 나무 의자에 앉아본다. 달래는 바람이 불고 숲의 그림자가 춤춘다. 어둠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 주변을 맴돌다 어색한 현실만 남기고 기억 속으로 기어나간다.



이제 다시 빈자리. 돌아온 일상의 의자. 바다의 빛과 숲의 어둠을 생각한다. 사람은 모른다. 죽는다는 말의 무게. 들어도 그게 정말일까? 정말이라도 내 일은 아닌 듯 불안감의 무게를 속이며 산다. 수없이 태어나고 죽는 이 현실의 바다에서 우린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맑은 물의 그 섬에서 낭만 따위보다 더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


살아있다는 그 꽃의 향기. 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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