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의 맛

by 서효봉

배고프다. 괜히 일찍 일어나 샤워에 면도까지 했더니 바로 신호가 온다. 경고. 경고. 에너지가 부족하오니 뭐라도 먹어야 합니다. 주변 사물을 스캔하세요. 냉장고와 부엌을 둘러본다. 찾았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근데 저거 먹을 수 있나요? 결정권을 가진 신께서 아직 주무시는 관계로 일단 내가 직접 탐색해보았다. 양푼에 담긴 자두들. 우리 집에 온 지 일주일은 넘은 것 같은데 오늘따라 유독 탐스럽게 보이네. 정밀진단(?) 결과 전체적으로 통과다. 삼분에 이 정도는 살짝 무른 것 같지만 나머지 삼분에 일은 아직도 단단하다. 너 생각보다 오래간다?

크기변환_KakaoTalk_20180825_090500858.jpg


이 자두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에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실 그 날은 동네에 어떤 분이 복숭아를 판다고 하여 사러 간 날이다. 지난번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 우리 신께서 친히 그분의 집 근처로 방문. 참고로 우리 신은 복숭아를 아주 좋아하신다. 나는 복숭아 숭배자가 아니지만 똘마니로 따라나섰다. 복숭아 판다는 그분의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연락을 하니 아직 차에 실어서 오는 중이라 했다. 오호. 산지직송 바로 수령. 뭐 동네 산책이나 좀 하다 보면 금방 오겠지 싶어 신과 함께 산책을 했다. 헌데 너무 덥다. 밤 9시에도 이렇게 덥다니. 여긴 불지옥인가? 지구에 종말이 오는 걸까? 아무튼 너무 더워 산책을 중지하고 어두운 벤치에 앉아 귀신마냥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peach-415370_1280.jpg


그런데 10시가 되어도 깜깜무소식이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음. 그분의 아파트 주변을 잠시 서성이다 집으로 컴백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신께서 노하신 듯하다. 우리 집 근처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연락이 왔다. 지금 도착했으니 오라고. 장난하냐? 나는 신의 분노가 더 치솟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명랑하다. 나의 사랑, 복숭아만 있다면! 이런 분위기다. 아까의 분노는 기다려서가 아니라 복숭아를 영접할 수 없어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복숭아 한 상자를 건네받았는데 그분께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던지 덤으로 자두를 얹어주셨다. 자두는 상품성이 없는지 계속 얹어주셨는데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으면 내일 아침까지 계속할 기세였다. 신께서 그만을 외쳤고 딱 그만큼의 자두가 집에 왔다. 복숭아는 이미 지난주에 전멸했다. 자두는 신의 간택을 받지 못한 지라 계속 방치되어 있었는데 어쩌다 가끔 내가 먹어주었다. 가엾은 것들.


republic-of-korea-1057687_1280.jpg


처음 자두를 먹었을 때가 기억난다. 어릴 적 시골집에 가면 할머니는 내가 배고플 때마다 자두를 씻어주셨다. 난 그 자두를 한 입 먹고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시큼한 과일은 처음이다. 너무 시어 울었다. 나는 할머니가 자두를 식초에 씻어 온 게 아닌 가 의심했다. 할머니를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자두만 먹으면 할머니와 시골집이 떠오른다. 그런데 오늘 먹은 이 자두는 정말 달다. 첫날 자두가 우리 집에 왔을 때만 해도 할머니하고 외칠 뻔했는데 이제는 신기하게 단맛이 난다.


997c9cdbcfd7ae1597ea1d1ea0227579.jpg


나는 가끔 운명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떻게 올지 알 수 없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헌데도 막상 오게 되면 그게 그건지 모르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되는 것. 우연히 겪은 일과 옛 생각이 맛있게 만나면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자두를 먹으며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버스 정류장을 보았다. 이 새벽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버스가 온다. 할머니가 힘겹게 버스에 오른다. 멀어지는 버스. 다시 찾아온 정적. 자두 하나를 더 입에 문다. 시큼한 맛이 혀끝을 타고 오른다. 다시 돌아간다.

이전 03화110점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