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설가의 모임 시간이 되었다. 응접실엔 이미 동혁과 준수 그리고 민정이 와 있었다. 잠시 후 희경과 루키도 응접실에 나타났다.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서재 주인장 영래와 1층에서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선재다. 지난번처럼 영래가 등장하니 다들 일어나 인사를 했다. 영래는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선보이며 앉으라고 이야기했다. 평소에는 2층에 거의 올라오는 법이 없는 선재가 함께 온 건 좀 의외였다. 영래 옆에 비서처럼 서 있던 선재는 사람들에게 팸플릿을 하나씩 나눠줬다.
“소설가의 마을?”
팸플릿을 본 동혁이 놀라며 묻자, 영래가 말했다.
“그래요. 이제 서재 작업실도 다 찼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고 해요.”
동혁뿐만 아니라 팸플릿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재는 뭔가 일이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시작한다니? 뭘? 소설가의 마을은 또 뭔가? 팸플릿에는 전원주택 같은 건물 사진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소설가의 마을을 조성하기 위한 계획표가 나머지를 채우고 있었다. 영래는 선재에게 받은 팸플릿을 잠시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 너무 갑작스러운 거 나도 알아요. 일단 여러분 의견을 좀 들어보려고요.”
소설가의 마을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라고 했다. 소설가의 서재는 함께 마을 공동체를 만들 소설가들을 모집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작업 공간을 빌려주고 소설가들의 역량을 평가한다. 역량 있는 소설가들은 마을에 조성된 작업실로 옮겨가 더 쾌적하게 작업한다. 서재의 작업실은 계속 운영하면서 새로운 소설가들을 모은다. 마을로 보낸다. 모은다. 보낸다. 이런 식으로 소설가를 무진장 모집해 마을을 만들겠다는 게 영래의 계획이다. 마을에 입주하면 매달 창작지원금이 지급되니 생활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라 했다. 다들 갑작스러운 제안에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루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인 영감님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봉사활동이라기엔 너무 거창한데.”
영래는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 오랜 꿈이요.”
인재는 정신과 의사의 꿈치고는 묘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소설가들의 정신세계 분석 같은 얄궂은 연구라도 하려나? 동혁이 말했다.
“저는 좋습니다. 지금도 좋지만, 지원금까지 주신다는 데 황송하죠.”
동혁을 시작으로 다른 소설가들도 저마다 찬성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남은 건 민정과 인재뿐이었다. 민정은 잠시 영래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꺼냈다.
“전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겠죠? 할아버지?”
영래는 약간 놀란 것 같더니 답했다.
“동의하마. 민정아.”
희경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잉? 너 주인 영감님 손녀였어?”
동혁과 준수, 루키, 인재도 새로운 사실에 놀랐다. 루키는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오늘 무슨 날이야? 놀랄 일이 많은데?”
이제 남은 건 인재뿐이다. 인재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전 여기 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지망생일 뿐인데 그냥 여기 남는 건 안 되나요?”
영래는 웃으며 말했다.
“인재씨는 가고 싶어도 자격이 안 됩니다. 문학상을 받아 데뷔한 소설가 중에 선발하는 겁니다.”
영래의 말에 동혁과 민정이 피식 웃었다. 민망해진 인재는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뭐 여기 계속 남을 수 있으니 일단 공부하는 건 걱정 없겠다 싶다. 의견 수렴을 끝낸 영래는 추진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날짜를 정해 다 같이 소설가의 마을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모델하우스 구경 가는 거냐는 민정의 말에 다들 웃었다.
논의를 끝내고 오늘도 변함없이 젠가를 시작했다. 복수의 칼을 갈아온 민정은 이전보다 훨씬 신중하게 블록을 빼냈다. 다른 사람들도 사뭇 진지하다. 자기 소설을 공개하는 게 싫은 건지 그 약을 먹고 싶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인재만 빼고 다들 난리다. 인재는 어느 타이밍에 블록 탑을 무너뜨려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서 구멍이 숭숭 난 기묘한 모양이 되어 가고 있는 탑은 입으로 후하고 불어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때가 왔다고 생각한 인재는 손을 덜덜 떨면서 수전증 연기를 펼쳤다. 그 손으로 아래쪽 블록 하나를 빼내자 탑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인재는 아쉬운 척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그 연기가 어색했던지 다들 이상하다는 눈으로 잠시 쳐다보긴 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영래가 말했다.
“오늘은 인재씨 소설이군요. 처음인데 괜찮아요?”
“네, 부족한 글이지만, 한번 써 봤습니다.”
인재는 막상 소설을 낭독하려니 떨렸다. 혼자서 소설을 읽을 땐 몰랐는데 누군가에게 들려주려니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 금방 끝날 일이다.’라는 말을 되뇌며 낭독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약을 먹고 눈을 감았다. 인재의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린다.
“2003년. 개미. 개미가 기어 온다. 보던 책을 계속 본다. 젠장. 신경 거슬리는 개미. 개미를 다시 본다. 저기 있던 녀석이 언제 여기까지? 순간 이동한 것처럼 내 발밑에 와 있다. 덩치 큰 그 녀석은 이리저리 더듬이를 움직이며 바쁘게 발을 놀린다.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분주하던 놈은 결국 사고 친다. 내 다리 위로 기어오른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소설 낭독이 끝났다. 인재가 고개를 들자 언제 사라졌는지 영래가 보이지 않았다.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바로 하나둘씩 깨어났다. 다들 그냥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동혁과 준수가 휘파람을 불며 한마디씩 했다.
“오, 생각보다 제법인데?”
“역시 인재씨도 재능이 있군요?”
인재는 두 소설가의 칭찬에 황송해했다. 희경과 루키도 참신한 소재로 잘 쓴 것 같다며 격려해 주었다. 희경은 나중에 따로 읽어보게 하나만 복사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모두가 인재에게 모여들어 소설 이야기를 나누며 이번 모임은 훈훈한 분위기로 끝났다. 어깨가 으쓱해진 인재는 민정을 찾았다. 얼마 전 인재에게 모욕감을 줬던 초등학생은 표정이 어두웠다. 그 작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숨이 막힌다는 듯 가슴을 친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인재가 민정에게 달려갔다.
“야 왜 그래? 어디 아파?”
민정이 쓰러졌다. 동혁과 준수가 영래를 찾아 아래층으로 달려갔고, 루키가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인재는 루키 옆에서 그를 보조했다. 희경은 119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