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가 고장 났다. 갑자기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는 아내의 말에 또 시작인가 싶었다. 가볍게 여겼다. 작년 이맘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보일러 컨트롤러를 만지작거려 해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번엔 단단히 고장 난 모양이다. 아무리 만져도 변화가 없었다. 보일러를 몇 번이나 껐다가 켜도 그대로였다. 게다가 보일러 안에서 탕탕거리는 소리가 나고 연통이 꿈틀거리기까지 했다. 보일러 수리기사가 와서 덮개를 열고 잠시 살펴보더니 말했다.
“여기 보시면, 응축수 나오는 곳이 찌꺼기나 먼지 때문에 막혀서 그래요. 보세요. 여기 물 차 있는 거.”
그러면서 석회 찌꺼기 같은 게 가득 담긴 물컵 크기의 통을 보일러에서 꺼내 싱크대에 털었다. 나는 그런 게 보일러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찌꺼기를 털어주고 육만 원을 달라는 기사의 말에 더 놀랐다. 찌꺼기를 제거한 덕분인지 보일러는 다시 쌩쌩하게 돌아갔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근데 보일러 밑으로 이어진 온수관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새어 나온 물이 보일러 아래에 흥건하게 고여 있어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사람을 불렀다. 금테 안경을 낀 배 나온 사내가 나타나 보일러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거, 아랫집 천장까지 젖었을 수도 있겠는데요?”
“네?”
“다른 집에도 이런 적 있었거든요.”
“아니, 이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새는 거죠? 하자 아니에요?”
“하자죠. 근데 이거 보증 기간이 지나서 알아서 고치셔야 해요. 아랫집 천장도요.”
“네?”
보일러는 막히고, 배관은 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난 그 생각을 하며 천장 수리 업체에 전화해 공사 일정을 예약했다. 모처럼 쓴 연차 휴가의 절반을 집수리로 날렸다. 씻고 옷을 챙겨 입은 후 나갈 준비를 했다. 곧 고등학교 동기들 모임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퇴근 시간과 겹쳐서 대로는 차로 가득했다. 길게 늘어선 행렬 사이로 다양한 모양의 후미등이 빛났다. 나는 즐겨 듣는 팟캐스트 방송을 켜고 브레이크에 발을 붙였다. 차가 막히긴 했지만, 조금 일찍 출발한 덕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강변대로 근처쯤에서 묘한 걸 발견했다. 달이 뜨고 있었다. 노란 달이 아니라 검붉은색을 띤 커다란 보름달이었다. 이상하게 컸다. 달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달을 빤히 쳐다보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그때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잠시 후 다시 한번 큰 충격이 덮쳤다.
한때는 아주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 믿었다. 자신 있었고, 그럴만한 청춘을 손에 쥐고 달렸다. 앞에 뭐가 있어도 허들 넘듯 뛰어넘으면 그만이었다. 취직 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이렇게 작아질 수 있다는걸. 작아지다 못해 점이 되어 사라져 버릴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 의심을 했다. 나는 종일 눈 부릅뜨고 허우적대다 잠의 바다에 가라앉았다. 매일 침몰하는 나의 일상은 주말에야 겨우 인양되어 잠시 정비에 들어갔다. 물론 그마저도 두고 보지 못하는 인간들이 존재했다. 그 인간들 때문에 난 영혼을 회사 의자에 앉혀두고 밤늦게까지 퇴근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은 제정신이 들 때가 있었다. 표류하는 보트에 누워 정신을 잃었다가 지나가는 새 그림자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난 그럴 때면 대학 때 샀던 낡은 DSLR 카메라를 든 채 높은 곳에 올랐다. 새로운 공기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진 파일을 천 개쯤 생성한 다음 아무 데나 걸터앉았다. 맥주 한 캔을 마시면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랬다.
사실, 일하기 싫어 지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회사의 모든 영혼이 그러했다. 다시 내 영혼을 걸어둔 의자로 돌아와 일에 매달리다 상사 험담을 위한 정례 모임에 참여했다. 지친 얼굴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저마다 한 바가지씩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 올려 상식과 교양이라는 정제수에 희석해 내뱉고 있었다. 나도 한때는 열심히 그 짓을 했고, 누구보다 열변을 토하며 체제 전복을 꿈꿨다. 결론은 항상 퇴사에 가 닿았다. 그러면 뭐 하는가? 퇴사는 용기 있는 자들을 위한 선택지다. 난 겁쟁이다. 최대한 안전하게 뭐라도 해보려고 새벽마다 일어나 글을 썼다. 책도 출간했다. 뭔가 되는가 싶었지만, 피곤하기만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용기는 샘솟지 않았다. 난 요양원 고목의 아들이며, 부모를 유물처럼 생각하는 불효자에, 영혼을 팔아 돈을 벌고, 욕도 아깝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괴물이다. 발버둥은 이제 관두자는 마음으로 수면제 마흔 알을 준비했다. 모은다고 고생했다. 이걸 한꺼번에 먹고 잠들면, 잠들면, 잠들면, 잠이 들면, 침몰하겠지. 다시는 떠오를 수 없을 만큼 깊이. 가라앉는 순간까지도 편하고 싶어 검색해 봤다. 의외로 많았다.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이. 실제로 행동에 옮겨 사라진 영혼이. 손에 쥔 그걸 한참 바라보았다. 물부터 먼저 마셔야 할까? 너무 많은데? 나눠 먹으면 안 될까? 다 먹으면 배불러서 죽는 거 아냐? 그럼 아픈 거 아냐? 일단 한 알을 먹었다. 두 알을 먹고, 세 알을 먹었다. 아, 이거 뭐, 피곤하네. 피곤하다. 한 방에 어떻게 안 되냐? 피곤해. 잠 온다. 젠장.
강변대로에서 삼중추돌 사고가 일어났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운전자가 뒷목을 잡고 내렸다. 잠시 후 보험사 직원들이 도착했다. 사고 처리를 끝내고 얼른 약속 장소로 향했지만 삼십 분 지각이었다. 친구 놈 중 하나가 후래자 삼배라며 소주 석 잔을 세팅해 주었다. 난 손을 내저으며 저항했지만, 그 인간들의 성화를 이겨내긴 어려웠다. 석 잔을 연거푸 마셨다. 새 안주가 나왔다. 오늘따라 술잔 돌리는 속도가 빨랐다. 다들 그동안 술이 고팠던지 무섭게 술잔을 채우고, 권하고, 마셨다. 나도 덩달아 계속 마시다가 은근슬쩍 화장실로 가 흐름을 끊었다. 바깥바람도 좀 씌고 자리로 돌아오니 다들 주식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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