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불행은 한꺼번에 닥쳐온다

설상가상

by 올대리

침대에 시리를 눕혔다. 스페인의 의료 시스템 상 곧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긴 어려웠다. 다행히 시리는 상처만 심하게 났을 뿐 어디가 부러지진 않았다. 대충 지혈만 시키고 약국에서 간단하게라도 치료를 받기로 했다.

"은,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놀랐잖아. 근데, 진짜 경찰 불렀어?"

"아니 뻥이지."

우리는 쿡쿡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다니. 시리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풉. 어느 정도 지혈된 거 같으니까 빨리 약국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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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랴부랴 약국에 도착했다. 다행히 약국 주인과 시리는 아는 사이라 주인은 시리의 상처를 꼼꼼하게 봐줬다. 까진 손등에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무릎의 상처는 꽤 커서 붕대로 감았다. 당분간 움직이기 불편하겠지만 흉 질 수 있으니 매일매일 붕대를 갈아 관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계산을 하려고 크로스백을 열었다. 그런데 가방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방 옆은 찢겨 있었다. 시리와 나는 사색이 됐다. 지갑은 물론 휴대폰과 여권까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사고 회로가 멈췄다.

"일단, 카드. 카드 정지부터 하세요."

약사가 말했다. 시리는 곧바로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 휴대폰을 받아 들고 약국 밖으로 나갔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카드사 번호를 검색하고 전화했다.

"여보세요."

3개월 만에 듣는 한국말이다.

"아, 네 안녕하세요. 해외에서 카드를 분실해서 정지하려고 하는데요..."

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앱 들어가서 정지하셔도 됩니다. 물론 전화도 가능하고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휴대폰도 잃어버려서요..."

카드를 정지시켰다. 지금쯤 한국은 저녁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일 터다. 여긴 이렇게나 말간 아침인데. 콜센터가 아직 문을 닫지 않아 다행이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말하니 숨통이 트였다. 상담원과 통화하면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내가 겪은 이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뻔했다. 모국어가 주는 힘인가. 나는 통화가 끝났지만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디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나처럼 시간도 덩달아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스페인의 태양은 따갑다. 숨을 천천히 고르고 다시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시리. 미안한데,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시리는 대답도 하지 않고 50유로를 꺼냈다.

"치료받고 집에 가 있어. 나 기차역 좀 다녀올게."




나는 50유로를 주머니에 넣고 기차역을 향해 달렸다. 찢어진 치맛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내 짐을 꼭 찾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 제대로 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마주한 건 문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시리의 집으로 돌아가도 입을만한 옷은 없을 것이다. 발렌시아에 간다고 아끼는 옷과 화장품을 바리바리 챙겨 갔기 때문이다. 짐을 찾아야만 한다. 나는 비장하게 인포데스크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아까 열차에서 짐을 분실했는데요."

인포데스크 직원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포데스크 직원은 심드렁했다. 열차서 잃어버린 짐을 자신들이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했다. 눈앞에서 소매치기가 캐리어를 가져갔고, 폭행을 저질러 사람이 다쳤다고도 했다. 휴대폰과 여권까지 잃어버렸으니 CCTV를 확인해서라도 짐을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난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다쳤다고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분명 열차 안에서 짐을 도난당했고, 그들은 인종차별적인 말로 우리를 조롱한 것도 모자라 폭력을 휘둘렀다고. 지금 내 친구가 피를 철철 흘려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짐을 찾는데 협조만 해달라는 건데 어떻게 이렇게 모르쇠일 수 있냐며 한국말로 소리쳤다. 기차역 직원들이 모두 달려 나와 나를 진정시켰다. 짐을 잃어버린 심정은 알겠지만 자기네들도 뭘 해줄 수가 없다고만 반복했다. 어쩜 이렇게 안일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국 경찰을 불러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