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세상 맛없는 햄버거

갑자기 맛 없어진 음식엔 다 이유가 있다

by 올대리

어이가 없었다. 나는 짐을 통째로 빼앗겼고 가장 중요한 여권과 휴대폰도 도난당했다. 저 기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내가 무식하게 소매치기를 따라가지만 않았어도 시리는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분노와 자책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경찰 두 명이 인포데스크 직원과 얘길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노려봤다. 어느새 기차역으로 온 시리가 나를 달랬다. 그래도 진정할 수 없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감정 조절 능력을 잃었다. 이성을 잡을 힘조차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했단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신사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었는데 왜 참지 못했을까. 엄마와 아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를 비웃었을 것이다. 일단은 후퇴하고 법적으로 따져야 한다고 말하는 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린다. 더운 나라에서 벌벌 떨고 있는 꼴이라니. 떠는 모습이 들킬까 손으로 온몸을 감쌌다. 흔들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리가 나를 토닥였다.

"CCTV 확보했으니까 일단 경찰서로 함께 가시죠."

맙소사. 남의 나라 경찰서까지 가게 되다니. 잃어버린 내 짐을 좀 찾아달라는 것뿐이었는데 죄인이 된 기분이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누르고 그들을 따랐다.

"너무 걱정 마, 은."

경찰차에서 시리가 말했다.

"응. 근데 넌 괜찮아?"

"괜찮아. 좀 까졌을 뿐이야."

"좀이 아냐. 많이 다쳤어."

"괜찮다니까. 지금 상처가 중요해? 찾아야지, 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는 지금 도둑맞은 내 짐을 찾으러 가는 중이다. 분위기를 보면 내가 짐을 훔쳐 연행당하는 꼴이지만. 엄한 모습으로 무턱대고 경찰차에 타라는 저 경찰들. 내가 소동을 부린 탓에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쳐다봤던 관중들. 나는 엄연한 피해자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했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나 잘못한 일인가. 가해자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곤욕을 치르는 것도, 전전긍긍하는 것도 피해자의 몫이다. 이 세상에서 가해자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 만하니까.

"짐은 포기하세요. 어차피 못 찾아요."

조수석에 앉은 경찰이 말했다.

"그럼 제가 경찰서에 가는 이유가 뭐죠?"

나는 매섭게 말을 받아쳤다.

"CCTV 보고 싶다면서요."

"CCTV가 아니라 제 짐을 보고 싶은데요."

기죽지 않았다. 옆에서 시리가 영어로 귀띔을 해줬기 때문에 스페인어로도 수월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미 훔쳐간 걸 무슨 수로 찾아요? 대충 하고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경찰이 웃으면서 말했다,

"왜 웃으세요?"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옆에 있던 시리가 놀랐다.

"은..."

"왜 웃으시냐고 물었어요. 이 상황이 웃기세요?"

"진정하세요. 옆에 중국 소녀도 보아하니 진정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해 어려 보이는 구석이 있다. 동양인에게 '어린 소녀'를 뜻하는 '니냐'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를 자주 봤다. 들을 때마다 어딘가 불편했었는데. 성인에게 아이를 지칭하는 용어를 쓰다니.

"니냐? 지금 니냐라고 했어요?"

"미안해요. 됐죠? 진정하세요. 거의 도착했으니."

경찰이 건성으로 말했다.

"당장. 제대로 사과하세요."

"..."

"사과하세요. 정중하게."

나는 한국말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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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 도착했어도 나는 기다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제부터 잔 잠이라곤 열차에서 웅크리고 잔 쪽잠뿐이었다. 무슨 체력인진 몰라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은, 이거라도 먹어. 너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시리가 햄버거를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

잠만 못 잔 게 아니라 밥도 못 먹었구나. 그러나 배도 고프지 않았다. 무엇이 내 본능을 막았을까.

"일단 먹으라니까."

시리는 햄버거를 다시 가져가 봉투를 깠다. 그러곤 내 손에 다시 쥐어줬다. 나는 마지못해 한 입 먹었다. 맛이 없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은. 혹시나 하는 말인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해. 만약 짐을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찾을 거야."

나는 시리의 말을 끊었다.

"은..."

"내 짐, 꼭 찾을 거라고."

나는 햄버거를 열심히 씹었다. 시리의 말이 맞다. 짐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머리론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 포기가 안 된다. 여기까지 왔는데 손에 아무것도 넣지 못하고는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이 따위의 몰골로 한국에 돌아가기 싫었다. 이왕이면 더 멋지게, 더 나은 모습으로 집에 가고 싶었다. 나, 이만큼이나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스페인어도 제법 할 줄 알고, 강요가 아닌 의지로 나를 꾸밀 줄도 알게 됐고, 나를 알아주는 친구도 사귈 수 있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어도 절대로 쏟아내지 않을 것이다. 초인적인 힘으로 버텨낼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했던 경찰서에 굉음을 내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경찰관은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전화를 끊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직감으로 알았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걸어오는 경찰관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