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화. 은빛 도전

어떻게든 되겠지

by 올대리

북적이는 마드리드 공항. 나라마다 공항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점은 같다. 짐을 한가득 들고 있는 사람들 틈에 나와 시리가 서 있다.

"밥 안 먹어도 괜찮겠어?"

시리가 물었다.

"응. 기내식 먹으면 돼."

"기내식 맛없다며."

난 기내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지근하게 식은 반찬 같은 느낌이 싫었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사 먹고 비행기에 타면 굳이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이었다.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미리 업그레이드 예약을 해서 먹곤 했다.

"그러게. 근데 그냥 먹어보려고. 맛있을 수도 있잖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가길 바랄게. 도착해서 메신 보내고."

"응."

나와 시리는 말없이 땅만 쳐다봤다. 아름다운 이별이 없다는 건 알지만 이별은 늘 슬프다. 아주 나중에 떠올렸을 땐 아름다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슬프다. 그동안 너무 즐거웠고 또 많은 걸 배웠다. 어제 먹은 마파두부도 생각나고 호세한테 집어던진 화분도 생각난다. 시간 순서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추억이 떠오른다.

"이거 받아."

시리가 내게 가방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가방이잖아."

"그러니까 무슨 가방이냐고."

"일단 메. 이별 기념 선물이니까."

이별 기념 선물이라니. 아, 생각해보니 나도 변용희에게 이별 기념 선물을 줬다. 헤어질 줄도 모르고 산 셔츠였지. 어디 있더라. 한국 가서 찾아봐야겠다. 시리와 나는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나는 시리가 준 가방을 메고 입국장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시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행기를 탔다.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 사람들이다. 아빠는 끝내 날 배웅하러 오지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아무렴 어떤가. 출장 때문에 몇 달은 지나야 아빠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될 문제다. 나는 구석에 앉아 창밖을 봤다. 무거운 캐리어를 비행기에 싣는 사람들이 보인다.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캐리어를 잘도 다룬다. 소란스러웠던 기내가 이륙한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조용해졌다. 나는 시리가 준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휴대폰 하나와 은빛 다이어리가 있었다. 언젠가 내 이름 뜻을 알려준 적이 있었는데, 시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이어리를 펼치자마자 편지 한 장이 떨어졌다.


안녕 은. 편지로 말하려니 쑥스럽다. 차라리 말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스페인에서 너와 좋은 추억을 만든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 소중한 시간이었거든.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너 비행기에서 심심할까 봐 한국 노래도 찾아서 휴대폰에 넣어놨어. 축 쳐져있지 말고 기분 좋게 돌아갔으면 해. 유치장에서 눈을 감고 있는 너를 본 적이 있어. 마음이 좋지 않았어. 그래도 네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몸은 지쳐있었지만 뭐랄까, 단단해 보였거든. 우리가 또 언제 만날 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지금처럼 잘 살길 바랄게. 이 다이어리와 또 다른 하루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어. 응원할게.


p.s 네 이름 정말 예뻐.


이어폰을 꼽고 휴대폰에 있는 음악을 틀었다. 아이돌 노래부터 발라드까지 다양하다. 이런 건 또 어디서 찾은 건지. 코끝이 찡하다. 나는 승무원에게 볼펜을 빌렸다. 계획표가 아닌 일기장이 될 은빛 다이어리에 지금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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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잤다. 오랜만에 푹 잤다. 시리의 노래 덕분이다. 짐이 많은 사람들 사이를 가볍게 뚫고 지나갔다. 짐 없이 비행기를 탄 적은 처음이다. 머리 위 선반에서 무거운 짐을 내릴 일도 없었고 수하물을 찾느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었다. 광활한 인천 공항을 통과하고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5분이다.

'얜 어디 있는 거야.'

아무리 찾아도 정소영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통신사 안내데스크로 가서 유심을 사고 시리가 준 휴대폰에 끼워 넣었다. 개통된 휴대폰이 반응한다. 와이파이 주파수가 서서히 차오른다. 하나, 둘, 셋, 넷. 연결되자마자 정소영에게 전화를 했다.

"야! 너 어디야!"

"뭐야? 이 번호 뭐야? 그새 못 참고 산 거야?"

"그게 중요해? 어디냐니깐?"

"나 여기 입국장 앞인데."

눈 씻고 찾아봐도 파란 머리통은 찾을 수 없었다. 정소영이 파란색으로 탈색을 했다고 했다.

"너 없는데 무슨."

"헐"

"왜?"

"나 출국장 앞인가 봐..."

그럼 그렇지. 길치 정소영을 믿는 게 아니었다.

"어휴. 너 거기 있어. 내가 가는 게 빠르겠다."

나는 전화를 끊고 출국장으로 올라갔다. 입국하자마자 출국장으로 갈 건 또 뭐람. 저 멀리서 파란 머리통이 보인다. 색깔 한 번 잘 빠졌네. 나도 분홍색으로 염색이나 해볼까. 파란 머리통만 보고 웃으면서 걸어갔다. 그때, 웬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변용희다.

"뭐야?"

내가 물었다. 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오랜만이네."

변용희가 말했다.

"어."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머리 잘랐어?"

변용희가 나를 훑었다. 아빠가 훑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네가 훑는 건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어, 왜?"

"많이 변했네. 어디 가는 거야?"

"어."

그 뒤로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짧게 대답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란 머리통을 향해 걸어갔다.

"정소영!!!"

"김은!! 야 김은!!"

드디어 상봉한 우리는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렀다. 입국장도 아닌 출국장에서.

"나 입국하자마자 출국장으로 부른 너는 참 대단한 사람이야."

"와 그건 둘째 치고. 너 아닌 것 같아. 대박 진짜 좋아 보여."

정소영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나 배고파 정소영."

"뭐 먹을래? 언니가 쏜다."

"떡볶이!"

"웬일이야? 너 살찐다고 떡볶이 안 먹었잖아."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거야."

"콜!"

우리는 분식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정소영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쫑알쫑알 쉴 새 없이 말했다.

"근데, 너 나한테 줄 선물은 안 사 왔냐? 그 쪼끄만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 거 같진 않은데."

"내가 선물 살 정신이 어딨냐? 내가 선물이지."

"어쭈. 당당하다?"

"당연하지. 이모! 여기 즉석 떡볶이 2인분에 사리 추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