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불꽃놀이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나

by 올대리

눈을 뜨니 새벽이다. 시리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울다 지쳐 잔다는 게 이런 건가. 창밖을 봤다. 어둡고 조용한 마드리다. 나는 시리의 담배를 챙겨 조용히 바깥으로 나갔다.

집 앞에 웅크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정소영과 시리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곁눈질로 본 게 내가 아는 담배의 전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도대체 왜 피우지? 저러다 중독이라도 되면 어쩌지?라고만 생각했다. 나라고 담배에 중독되지 않을 이윤 없으니까. 한참을 불을 붙였는데 실패했다. 담배를 입에 물어도 물지 않아도 불은 붙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결국 포기하고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골목을 돌아다녔다. 참 어둡다. 홀로 밤거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걸어 다니는 건 처음이다. 낯설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오래된 돌길을 걸었고 낡은 간판이 있는 건물을 구경했다. 그때, 여자 두 명이 그 건물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조잘거리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한 명이 양손을 펼쳐 받침대를 만들고 다른 한 명이 그 위에 얇은 종이와 거무튀튀한 가루 같은 것을 차례대로 올린 후 정성스레 돌돌 말았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꺼냈다.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실패했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불을 붙이고는 '스읍'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셨다. 얇은 담배의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입에서 담배를 떼고 '후'하고 숨을 뱉었다. 어둠 속에서도 연기가 흩날리는 건 잘 보였다.

나는 다시 집 앞으로 갔다. 꼬깃꼬깃하게 구겨져있던 담배를 다시 꺼내 아까 본 대로 따라 했다.

"컥컥!"

나도 모르게 기침이 나왔다. 목이 따가웠다. 난생처음 느끼는 맛이다. 자동차 매연 앞에 입을 벌리고 선 것 같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더 나올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끈질긴 놈이다. 그 뒤로 몇 번 더 시도하다가 기침만 실컷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아픈 목을 부여잡고 시리 옆에 곤히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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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 오늘 우리 어디 좀 가자."

주방으로 들어오는 태양 앞에서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시리에게 내가 말했다.

"어디?"

"저거 봐봐. 내 마지막 캐리어야."

나는 주방 옆에 세워 놓은 캐리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버릴 거야?"

"응."




소각장 비슷한 곳에 왔다. 시리가 다니는 대학교 근처였는데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이곳에서 책을 태운단다. 땀을 뻘뻘 흘리며 캐리어를 열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스페인어 교재와 여기서 모은 스페인 책들이 가득했다. 그 사이에서 금빛 다이어리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무리 낡았어도 바래지 않았구나. 멀리서 보니 태양빛에 반사된 해변가의 모래사장 같기도 하고. 시리가 구석에서 작은 드럼통을 갖고 왔다.

"은! 이거면 충분할까?"

나는 얼른 시리를 도와 드럼통을 같이 끌었다.

"와. 딱이야."

시리는 자연스럽게 불을 붙였다. 담배 끝에 조명이 딱 켜진 것처럼 드럼통 안이 금세 밝아졌다. 나는 가만히 드럼통을 쳐다봤다. 불길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나자 은은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장갑을 끼고 캐리어에 있는 책을 운반했다. 땀방울이 얼굴에 송골송골 맺혔다. 생각보다 책이 많았다. 한 권 한 권 드럼통 안으로 던졌다.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른다. 가장자리부터 검은빛으로 변한다. 책은 순식간에 재가 된다. 선생님의 말을 적은 검은색 필기가 군데군데 보인다. 혼자 복습하며 메모했던 보라색 필기도 이따금씩 보인다. 스페인에 오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경찰서에서 만났던 그 파노라마 조각들이 다시 머리를 스쳐간다. 어느덧 금빛 다이어리 한 권만 남았다.

"시간 참 빠르다."

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한번 열어봐도 될까?"

시리가 물었다. 나는 시리에게 금빛 다이어리를 건넸다.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금빛 다이어리를 받아 든 시리는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시리의 옆에 서서 다이어리를 함께 봤다. 어쩌면 내 모든 것이 담긴 이 다이어리는 두고두고 간직할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의지가 꺾일 때마다 만졌던 다이어리다. 자료를 찾고 계획을 세우고 삶에 적용하는 순간순간마다 늘 나와 함께였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다이어리를 태우려는 게 아니다. 욕심에 사로잡힌 발목을 놔주려고 태우는 것이다.

"은. 고생 많았어. 진심이야."

"고마워."

시리가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나는 미련 없이 그것을 드럼통 안으로 던졌다. 양장지라 다른 교재들처럼 쉽게 타지 않았다. 다른 것들보다 더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쉽게 뜯겨 활활 탄다. 속지가 다 타들어가자 금빛 겉표지도 타기 시작했다. 재가 된 조각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생수를 쏟아부었다. 치지직 소리를 내며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캐리어가 텅 비었다.




방학이 끝난 시리는 다시 학원에 나가고, 그사이 나는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도시 곳곳을 누볐다. 스페인의 자동차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도 신호를 지키고 사람에게 길을 양보한다. 골목골목에는 오렌지가 떨어져 있다. 나는 소금 간이 되어 있지 않은 기다란 바게트를 좋아한다. 중국식당에서 맛본 최애 메뉴는 마파두부다. 최근에는 에스프레소에 도전 중이다. 초콜릿 한 조각과 먹으면 금상첨화다. 내가 스페인을 여행하며 알게 된 것들이다.

"이제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시리와 중국인 친구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시리는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며 내게 말했다.

"응. 이제 가야지."

"잘 만나고 와."

"응. 이따 봐."

시리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카페를 나섰다. 아빠는 이미 마드리드에 도착해있었다.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아빠를 창문으로 봤다. 이 더운 날씨에도 말끔한 정장 차림이다. 민소매에 짧은 바지를 입은 나와는 참 다른 모습이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는 카페 문을 열었다.

"아빠. 오셨어요?"

"어, 왔니?"

아빠는 나를 위아래로 훑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귀국은 언제 한다고?"

"내일이요."

"티켓 아직 안 바꿨니?"

"네. 예정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온 김에 유학하고 가. 학교는 알아봐 줄테니까."

"아니요. 한국 가서 복학할 거예요. 나중에 유학을 갈지 안 갈지는 제가 스스로 결정할게요."

"은아."

"네."

"네가 대학을 늦게 입학해서 이왕이면 빨리..."

나는 아빠의 말을 끊고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진짜 괜찮아요. 출장 조심하시고요, 저 먼저 한국으로 갈게요. 나중에 집에서 봬요."

목례를 하고 벌떡 일어났다.

"김은."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멈춰 섰다.

"이거, 갖고 가."

아빠가 테이블 위에 현금과 카드를 올려놨다.

"밥 잘 챙겨 먹고."

아빠는 한 마디 던지고 나보다 먼저 카페를 나섰다. 차에 올라탄 아빠가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쳐다봤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여전히 짧은 단발머리가 바람에 흩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