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과 연초 그 사이 어디쯤
이직을 생각하거나 혹은 지금 회사에서 올해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이맘때쯤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경력기술서(또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퇴사 생각이 없건 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 년 동안 회사원으로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리해 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 일종의 회고록이다.
왜 이 시기에 경력기술서 업데이트를 하면 좋을까? 성과 평가와 연봉 협상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마다 연협 시기는 다를 수 있으나, 대부분 연말이 되기 전에 일 년을 돌아보고 내년도 목표를 설정한다. 연초에 회사 전체의 목표가 정해지면 이어 팀 내 목표도 정해진다. 당연히 그다음은 구성원의 목표다. 그동안 어떤 일을 맡아서 했는지,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더 키워보고 싶은 스킬은 무엇인지 등을 미리 생각해 두면 성과 평가나 연봉 협상, 상사와의 면담 등이 부담스럽지 않다.
유튜브 <퇴사한 이형> 채널에서는 11월에는 경력기술서 업데이트를 시작하고 12월에는 이를 다듬으며 다른 회사의 공고를 볼 것을 추천한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산업군, 나의 직무와 연차 등을 고려하여 타회사의 공고를 보면 내 위치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직 생각이 없더라도 한 번 지원해 보면 시장 경쟁력까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업데이트한 경력기술서를 바탕으로 현 회사에서 해보고 싶은 업무를 제안해 볼 수도 있다. 혹시 모르지,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을지도. 업데이트된 경력기술서는 신년을 맞이하는 직장인의 황금 무기다.
경력기술서를 업데이트하면 좋은 점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나와 가장 많은 일을 하는 동료와 협업을 오래 하다 보면 뉴런을 공유하는 것 같은 사이가 된다. 적어도 업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손발이 맞는 때가 오면 그 사람과 경력기술서를 함께 업데이트하면서 서로의 강약점을 말해주는 피드백 시간을 가질 것을 추천한다. 손발이 맞았다는 건 업무를 위해 서로 노력했단 뜻이다. 인간적으로 너무 싫었다면 그 누구도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며, 누군가는 팀 또는 회사를 떠나면서 진즉에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나와 동료가 바라보는 나는 다르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강점을 "유연성"으로 꼽았는데, 동료는 "참여 유도"라고 말하더라. 나는 나의 성과를 "신규 카테고리의 콘텐츠 도입으로 미디어 톤앤매너를 변화시킨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동료는 "팀원들을 인터뷰해 콘텐츠 제작 프로세스를 바꾸고 생산성을 증대시킨 것"으로 정의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나의 회사 생활을 다각도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데 어찌 동료와 돈독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더 쌩둥맞은 소리지만 실제로 상사와 친밀해진 적이 있다. 동료와 상사는 조금 다른데, 동료와는 협업을 위해 서로 손발을 맞춘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동료도 노력한다. 반면 상사와의 관계는 하사가 좀 더 노력해야 한다. 상사는 더 많은 사람들과 손발을 맞춰야 하고, 더 큰 프로젝트에 얼라인되어있기 때문에 나와 맺는 관계 하나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상사는 나를 챙길 필요가 있다. 이때, 이미 정리한 경력기술서와 동료와 나눈 피드백을 토대로 '나'라는 사람의 회사 생활을 알린다면 어떨까? 상사는 적은 시간으로 나를 챙길 수 있게 된다.
팀장들은 항상 바쁘다. 바쁜 와중에 사내 정치 흐름도 알아야 하고, 어떤 업무를 가져오는 것이 좋은지 판단도 해야 하고, 팀원들의 성과나 리소스도 체크해야 한다. 바빠도 팀원들과 개인 면담을 하는 이유다. 귀중한 시간에 어버버 하기보다는, "제가 생각하는 성과와 강점은 이것인데요, 동료 00과 피드백 자리를 가졌을 땐, 이런 부분도 강점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팀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팀장은 절대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다음 프로젝트의 기획 방향성까지 제시해 준다.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중간 과정을 공유하면 디벨롭이 된다. 성과도 생기고 관계도 좋아진다.
경력 기술서를 업데이트하면 일어나는 가장 좋은 점이다. 동료와 상사에게서 받은 피드백을 정리하고, 새롭게 얻게 된 관점으로 그동안의 경력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현재 내가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 알 수 있다. 콘텐츠 기획자인 나는 나의 스킬을 "콘텐츠 기획과 운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료와 상사의 피드백을 받은 뒤로는 "프로젝트 매니징(PM)" 스킬까지 넓혀 생각할 수 있게 됐다.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관리하고 운영하는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이끄는 역량이다.
이 관점으로 첫 번째 회사, 두 번째 회사, 세 번째 회사의 경력을 다시 정리했다. 쌓인 데이터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정비하니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알 것 같더라. 그동안 나는 주로 프로젝트성 업무를 맡아왔고, 다양한 톤앤매너의 콘텐츠를 동시에 제작하였으며, 업무 프로세스별 타임라인을 설정하고 스케줄을 관리했더라. 데일리나 DB업무는 많이 지루해하고, 변화가 없는 안정적인 환경에 싫증을 느낀다. 홀로 일하는 것보다 협업을 좋아한다. 미래에 내가 몸 담으면 좋을 환경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앞이 안 보였던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부분이다.
맺음말
2023년의 회사 생활을 쭉 돌아봤다. 1월부터 기록해 놓은 업무 체크리스트를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3월쯤부터 같은 팀 디자이너랑 친해지기 시작했고, 5~6월에는 팀장에게 장난도 치고 있더라. 9월에는 워크샵 때문에 워라밸이 조금 망가졌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회복했고, 10월엔 성과 압박이 조금 있어 나름 심장도 졸였다. 경력기술서 업데이트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다.
쭉 보면서 느꼈던 포인트가 있다면,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고민 시간을 늘리지 말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하고 시도하는 데 투자하고 싶더라. 한 번만 더, 하루만 더 생각해보고 해 보려는 마음은 자꾸만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나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나?', '이걸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 회사는 나랑 안 맞나?'
마침 오늘 읽은 <세이노의 가르침>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건 그것을 종이에 적으라. 틀림없이 서너 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몇 줄 안 되는 문제에 대해 10분 안에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고민 아니다."
"고민과 문제를 혼동하지 마라. 고민은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운다는 뜻이고, 문제는 해답 혹은 해결이 요구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고민이 어떤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고민은 중지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직, 퇴사, 사업, 개인프로젝트, 공부 등으로 회사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10분만 해보고 경력기술서를 업데이트하는 건 어떨까? 희미하던 미래가 조금 확실한 방향으로 또렷하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연말 연초에 한다면 현 회사에서 목표를 설정하거나 다른 회사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두 가지 대안에 모두 도전할 수 있는 황금 기회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