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처음부터, 다시

-떠납니다-

by 올대리

아쉽게도 교환학생 접수기간은 이미 끝났다.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해야 스페인엘 갈 수 있을까. 혼자 여행을 간다고 하면 절대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삼수까지 해서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남들보다 더 빨리 많이 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런 목적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안 되는 건 되게 하면 그만이다. 금빛 다이어리가 준 가르침이다. 계획만 있으면 안 될 것도 없지. 오랜 고민 끝에 부모님을 속이기로 했다.

"나 PPT 한 번만 봐주라."

정소영에게 말했다. 아빠는 누구와 어떤 계획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지가 명확해야 나를 지원해준다.

"네 전 남친만 아니면 다 봐줄 수 있지."

"얄미워. 짜증나."

나는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정소영은 PPT를 뚫어져라 살펴봤다. 노트북으로 보면서 볼펜을 들고 있는 건 또 뭐람. 볼펜을 입에 물었다 손으로 돌렸다를 반복했다. 제법 국장다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이럴 때 보면 꼭 다른 사람이란 말이야.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순진무구한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순간이다. 눈 주변에서 빛이 난다는 걸 팀원들도 아는 모양인지 국장 집중할 때 멋지지 않아?라고 말하곤 한다. 묘하게 사람을 이끄는 확신에 찬 저 눈빛.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저 마력. 정소영도 엘리트다. 좀 괴짜 같은 엘리트. 애초부터 이 학교에 입학할 생각은 없었단다. 그저 시키는 대로 공부만 했을 뿐인데 덜컥 붙었단다. 죽어라 삼수까지 하면서 이 대학에 오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반면 아무런 생각 없이 오는 정소영 같은 사람도 있다. 처음 정소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꽤 억울했는데, 신보사 활동을 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뭐야. 날 네 거짓말에 이용하시겠다?"

PPT를 한참 보던 정소영이 입을 뗐다. 난 아빠에게 정소영과 함께 스페인에 있는 한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떠날 거라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칠 계획이다.

"넌 그냥 브리핑에 쓸 이름만 빌려주면 돼.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근데, 왜 발렌시아가 아니고 마드리드야? 너 발렌시아 간다며."

"우리 엄마 아빠, 내가 제3의 도시로 간다고 하면 내가 준비한 PPT 한 장도 안 보실 거야. 생각보다 따지는 게 훨씬 많은 분들 이거든. 뭘 생각하든 상상 이상이야."

"그래 뭐. 내가 네 부모님을 어떻게 알겠냐. 너도 근데 대단하다. 학교 이름부터 당장에 다닐 학원까지 다 찾아놨단 말이야? 전화해서 상담까지 받다니."

"밤새 조사 좀 했지."

"풉. 열정 대단한데? 걱정하지 마. 진정성은 언젠가 먹혀."


10화 일러스트.png


PPT를 마지막으로 수정하고 아빠에게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이 끝났는데도 아빠는 아무런 말이 없다. 맘에 안 드는 표정도 아닌데. 사실 영어권 나라에서는 제2외국어가 스페인어고,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는 스페인 이외에도 많다. 약 5억 명이 사용하는 중요한 언어다. 영문과인 내가 스페인어를 배우면 같은 라틴어 계통이라 배우기도 쉽고 경쟁력도 생긴다는 점에서 아빠는 좋아할 게 분명했다. 외교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빠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생각에 잠긴 저 골몰함은 도대체 뭐지.

"음..."

아빠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그래, 6월에 출국할 생각이라고? 시간이 좀 빠듯하네. 3월이 거의 끝나가는데."

"입시 공부하듯이 타이트하게 진행하려고요."

"알아본 대로 비행 편 빨리 예약해."

아빠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속으로만 환호를 질렀다. 얼굴엔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암묵적인 집안의 룰을 지키고 있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전문 사육사에게 완벽하게 길들여진 한 마리의 개 같았다.

"네. 바로 찾아볼게요."

"아 그리고. 아빠가 사실 9월에 마드리드로 발령이 나서 잠시 갔다 올 계획이야. 네가 거기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지원해줄 수도 있으니 염려 말고."

이런 건, 내 예상에 없었다.




"여보세요? 성공했어?"

정소영이 전화로 말했다.

"어 하긴 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뭔데?"

"아빠가 9월에 마드리도 오시겠대..."

"뭐?????????????????"

전화기를 뚫은 쩌렁쩌렁한 정소영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왜? 너 감시하러 오시는 거야?"

"아니. 발령이 났대. 이게 무슨 타이밍이야."

전화를 끊고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냉장고에서 가스 활명수를 꺼낸 다는 게 술을 꺼냈다. 습관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얼른 술을 집어넣고 가스 활명수를 입에 털었다. 될 사람은 뭘 해도 된다는데. 난 될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친언니나 정소영처럼 될 사람 노릇 좀 해보려고 노력했건만. 그래도 여기에서 멈출 수 없었다. 그간 밤을 새 가며 계획한 게 있는데 무너질 수 없었다. 금빛 다이어리를 펼쳤다. 정소영네 집에서 찍어온 해변가 그림을 인화해서 붙여놨다. 사진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반드시 갈 거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페인엘 가야겠다고.




그렇게 나는 고 6이 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스페인어 학원으로 향했다. 학업과 학업 외 공부를 완벽하게 병행했다. 자는 시간을 좀 줄였더니 성적에도 문제가 없었고 학원 수업도 잘 따라갔다. 한편으론 해변가가 스페인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같은 알파벳을 쓰고 있을뿐더러 어순과 문법 또한 비슷하기 때문에 배움에 속도가 붙었다. 주어에 따른 동사 변환과 발음만 익숙해지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등하교 대중교통 안에서 단어를 외웠고, 귀에는 늘 스페인어가 흘러나오게끔 설정해두었다. 주말엔 시간을 내서 스페인어 스터디에도 참석했다. 금빛 다이어리가 이내 너덜거렸다. 찢어진 부분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수도 없이 계획을 세우고 지키고 세우고 지키고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출국일은 다가와 있었다.

"뭔 놈의 짐이 이렇게 많아? 이민 가냐?"

정소영이 입을 헤 벌리고는 캐리어를 툭툭 쳤다.

"필요한 것만 쌌는데도 좀 많네."

"누가 맥시멈니스트 아니랄까 봐."

스마트폰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온 정소영과 달리 나는 큰 캐리어 1개, 기내용 캐리어 1개, 몸집만 한 가방까지 들고 서 있었다. 대부분이 옷과 신발, 그리고 화장품이다. 동양인을 무시한다는 블로그 글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빡세게 꾸며야 한다.

"아무튼 잘 다녀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나 갈게."

정소영에게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야 김은!"

"왜 또?"

정소영이 나를 안아줬다.

"맘껏 놀고 울고 먹고 와."

"내가 언젠 안 그랬냐."

"어 안 그랬어. 그리고..."

"그리고 뭐?"

"거기 한국 아니잖아. 너무 눈치 보지 말고..."

"...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