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스페인
비행기를 타자마자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스페인으로 떠나는 첫 여정! #스페인 #spain #España' 비행기는 무사히 하늘에 안착했는지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화장을 지우고 마스크팩을 얼굴에 붙였다. 기내는 건조해서 수분 관리를 철저하게 해줘야 한다. 그러고는 금빛 다이어를 펼쳤다. 수정될 계획은 없는지, 빼먹은 건 없는지 다시 한번 체크했다. 완벽하다. 20여 분이 지나 마스크팩을 떼고 수분 크림을 얇게 여러 번 덧발라줬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건조할 때마다 수시로 발라야겠다. 이제 잠을 좀 잘까 싶어서 눈을 감으려는데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용희 생각이 났다.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을까. 같이 스페인에 가면 더 좋았을 텐데. 그동안 용희의 인스타를 수시로 봤지만 아무 단서도 없었다. 배낭에서 스페인어 교재를 꺼내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빨리 간다. 공부의 매력 포인트다. 꼼짝없이 갇힌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공부만 한 게 없다. 집중을 하다 보면 희열을 느끼고 집중이 끝나면 보람을 느낀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는 뿌듯함과 공부로 지식을 쌓았다는 어떤 안정감이 나를 진정시킨다. 용희와의 이별은 아직도 견딜 수 없이 힘들다. 승무원이 준 와인을 두어 잔 마시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거의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다시 파우치를 꺼내 얼굴을 정돈하고 선크림을 꼼꼼하게 발라준 후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날씨가 많이 더운 거 같아 파우더를 공들여 발라줬다. 태양이 강렬한 스페인은 날씨가 많이 덥지만 습도가 낮아 대체적으로 건조하다. 그렇다고 땀이 안 나는 건 아니니 워터프루프 화장품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혹시 몰라 한국에서 화장품을 잔뜩 사 왔다. K뷰티 때문이다. 현지인과 친해지면 선물로 하나씩 줘야겠다. 화장을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봤다. 메이크업과 옷 상태를 확인하고 찡긋 웃어 보였다. 드디어, 스페인에 도착했다.
밤늦게 도착해 이미 세상은 어두컴컴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대중교통도 없었다. 한국에서 준비해 온 유심을 스마트폰에 끼워 넣고 금빛 다이어리를 펼쳐 숙소까지의 이동경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你是中国人吗?"
아까부터 공항에서 웅성거리던 중국인 무리 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영어로 대답했다. 중국인은 내게 다시 한번 말했지만 나는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피했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중국도 한국도 아닌 스페인이다. 내가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스페인어나 영어로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무례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콜택시를 불렀다. 집을 식독 무사히 숙소로 이동했다. 새벽에 도착할 것에 대비해 미리 경로를 알아둔 덕이다. 택시 안에서 금빛 다이어리가 들어 있는 배낭을 쓰다듬었다.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집주인 마르타는 마중 나와 있었다. 큰 입으로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다. 질끈 묶은 금발이 선선한 바람에 흩날린다. 마르타와 나는 스페인식 인사를 나눴다. 입으로 쪽 소리를 내며 양 볼을 맞댔다. 마르타는 이미 자고 있는 하우스 메이트들을 배려해 내게 속삭이듯 방을 안내했다. 화장실과 부엌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대충 짐을 풀고 의자에 앉았다. 여기가 천국인가. 10시간을 비행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슬리퍼 양쪽을 일일이 구분하며 신을 필요도, 옷을 갖춰 입고 있을 필요도, 자세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옷을 벗어던졌다. 알몸인 채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푹 자고 눈을 떴다. 스페인의 태양은 방 구석구석을 샅샅이 핥는다. 그 강렬함은 한국의 태양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내 방은 뜨거운 모래사장의 빛나는 모래알처럼 순식간에 달궈졌다. 모든 물건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반대편 창문까지 빨랫줄이 연결되어 있다. 빨랫줄에는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옷인지 실오라기인지 모를 것들이 잔뜩 널려있다. 어제 미처 풀지 못했던 짐을 정리하고 화장실에 가서 씻었다. 늦은 아침이라 그런지 숙소가 텅 비어있다. 다들 일찍부터 움직이는 모양이다. 어젠 너무 어두워서 숙소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참 신기한 구조다. 현관에서 오른쪽으로 살짝만 꺾으면 긴 복도가 나온다. 복도 사이사이에는 방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우스 메이트의 방인 것이다. 복도의 가장 끝엔 공용 화장실이 있다. 여성용, 남성용 화장실이 각기 따로다. 천장 곳곳에는 실링팬이 달려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깔끔한 화이트 톤. 현관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큰 식탁이 있는 주방이다. 이곳에서 모두가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상상된다. 싱크대 옆엔 간이 문이 하나 더 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그야말로 파라다이스. 좁지도 넓지도 않은 테라스가 펼쳐진다.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에스닉한 천에 덮여있다. 그 옆에 푹신해 보이는 화려한 문양의 소파도 이 분위기와 어울린다. 소파에 잠깐 누웠다. 선글라스를 갖고 나올 걸 그랬나.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뜰 수가 없다. 대충 룸 투어를 마치고 나는 방에 들어가 화장을 했다. 화이트 리넨 셔츠에 청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었다. 에코백에 간단히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