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 일단 흥미로움
금빛 다이어리에 적힌 첫 번째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동네를 살폈다. 은근한 골목에 자리 잡은 숙소는 낮에 보니 더 예뻤다. 대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동화 속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다. 높지 않은 건물들은 벽돌로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 만든 태가 났다. 좀 울퉁불퉁해서 아직 걷는 데엔 적응이 안 된 돌길마저 예쁘다. 낮은 샌들에 돌길의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Hola, buenos dias!"
카페 문을 열자마자 주인은 내게 인사를 건넨다.
"Hola, buenos dias!"
주인을 따라 똑같이 인사하고는 에스프레소와 크로와상을 주문했다.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색감이 이국적이다. 약간은 올드한 감성을 풍기는 앤티크한 테이블도 분위기 형성에 한몫한다. 유명한 곳이라 주변에 한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다 메뉴판에서 시선이 멎었다. 그간 스페인어를 공부한 보람이 있다. 메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간단한 인사말쯤이야 귀에 쏙쏙 박힌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빠르고 경쾌한 말소리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금빛 다이어리를 펼쳐 다음 계획을 살폈다.
미리 연락해둔 스페인어 학원에 갔다. 등록도 현지에서 할 수 있었고, 숙소도 연계해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스페인 구석에 자리 잡은 예쁜 숙소에서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단 학원에서 간단하게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뒤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한국인들이 없는 학원을 찾아다녀 그런가. 학생보단 아이들이 많았다. 개중 양갈래로 머릴 질끈 묶은 동양인 여자 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你是中国人吗?"
중국 아이였구나. 나는 씨익 미소를 짓고는 영어로 원장에게 물었다.
"여기 중국인이 많나요?"
"중국인이 많지 않은 곳도 있나요?"
우문현답이다. 나는 곧 있을 첫 수업을 기다렸다. 긴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는 강의실엔 천장을 가득 메운 큰 화이트보드와 실링팬, 에어컨이 다였다. 심플했다. 여기 수업은 보통 4명 이하의 대화 위주 형식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교실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난 테이블의 가장 끝에 앉아 선생님과 누군지도 모를 학생들이 어서 들어오길 바랐다. 그러나 수업 시간 정각이 돼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건가 싶어 원장실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3시에 수업 시작하는 거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아직 아무도 안 오셔서요."
원장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0분 후엔 다들 모이겠군요."
원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인자한 웃음으로 대화의 끝을 알렸다. 나는 머쓱하게 교실로 돌아왔다. 중국인 2명이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둘은 대화를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你好, 你是中国人吗?"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영어로 물었다.
"아, 무슨 뜻인가요?"
"당신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군요. 미안해요."
개중 한 중국인이 능숙한 영어로 답했다. 발음이 굉장히 좋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들어왔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수업을 시작했다. 다들 스페인에 1년쯤 머무르고 있단다. 특히 영어를 잘하는 중국인은 스페인어도 잘한다. 많이 사용해봤는지 자연스러운 발음이랄까. 스페인어는 영어처럼 확실하게 정해진 악센트는 없다. 제법 센 발음으로 빨리 말해야 하는 현지인의 스페인어를 들으니 내가 스페인에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첫 수업이 끝나고 나는 원장실로 갔다. 중국인들과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왕 유럽으로 온 거 유럽인들과 수업을 같이 듣고 싶었다. 스페인어 학원엔 단기로 찾아오는 유럽인, 러시아인, 미국인 등이 있다고 들었다. 레벨이 낮아도 상관없으니 그들과 수업을 듣고 싶다고 반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저녁 즈음에 장을 봐서 숙소에 왔다. 주방이 떠들썩했다. 하우스 메이트들과 마르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마르타는 반갑게 인사를 하곤 하우스 메이트들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어제 새로 들어온 한국인 학생이야."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은입니다."
나는 영어로 말하고는 스페인어로 한 번 더 말했다. 아무래도 스페인어는 영어처럼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수없이 연습했던 말도 머뭇거리게 된다. 못할까 봐 지레 겁을 먹어 그런 건가. 하우스 메이트는 4명이다. 이탈리아 남자와 멕시코 여자는 커플이고, 프랑스 남자는 이곳에서 2년째 유학 중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콜롬비아 여자 이사벨은 나와 비슷한 체구로 유독 내게 살가웠다. 모두 스페인어를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나만 얼버무린다. 이들과 친해져서 얼른 스페인어 실력을 끌어올려야겠다. 한국에서 공부해왔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열심히 해야겠다. 꼭 정복하리라 다짐했다. 마르타는 이따 저녁 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8시쯤 주방으로 모이라고 했다. 바로 옆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는 마르타는 늘 이곳을 청소하고 식물을 가꾼단다. 스페인의 태양을 먹고살아서 숙소의 식물이 탱글탱글한 줄 알았다. 역시 너희들도 정성을 먹고사는구나.
8시 정각에 주방으로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테라스에도 가보고 복도도 살폈지만 인기척도 없었다. 설마 저녁 파티가 뻥은 아닐 테고, 도대체 왜 아무도 없는 건가 싶었다. 그때 콜롬비아 여자 이사벨이 나를 불렀다.
"안녕? 이름이 은이라고 했나?"
이사벨이 영어로 말했다. 스페인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안녕. 넌 이사벨?"
"응. 근데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은은 무슨 뜻이야?"
"Silver라는 뜻이야. 우리 언니는 Gold."
"와 되게 재밌다. 한국은 이름을 독특하게 짓는구나."
"아 그런가. 하하. 그런데 8시에 저녁 파티가 있는 거 맞아?"
"그래서 지금 주방에 나와 있던 거야?"
"응..."
"하하하하하하하하."
이사벨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이사벨을 쳐다봤다.
"이곳의 시간은 좀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하면 돼."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시간의 속도가 다른 곳도 있어?"
"너 되게 귀엽다. 쉽게 설명해줄게. 오늘 우리는 8시에 저녁 파티가 있어, 그렇지? 근데 지금 나와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왜 그럴까?"
학원에서도 이랬다. 원장은 10분쯤이야, 하며 가볍게 시간을 무시했더랬지.
"보통은 30분, 많게는 한두 시간 정도? 다들 늦게 나와."
"왜?"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한국에서 시간은 금이다. 일분일초가 아까워 잠자는 시간을 쪼개고, 밥 먹는 시간을 쪼개고, 출퇴근 시간을 쪼갠다. 쪼갤 수 있는 시간을 초 단위를 넘어 나노 단위로까지 쪼갠다.
"왜라니? 문화에도 왜가 있나."
새로운 룰이 있는 세상으로의 진입이다. 나는 마르타가 들어올 때까지 이사벨과 대화를 나눴다. 마르타가 음식 운반하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나와 이사벨은 마르타의 집으로 가서 음식을 가져왔다. 하나둘씩 하우스 메이트들이 모였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다. 모국어가 스페인어인 사람들도 있고 스페인어와 비슷한 모국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스페인어로 이야기했다. 나의 모국어는 스페인어와 비슷하지도 영어와 비슷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알아듣는 게 어려웠지만 눈치로 곧잘 대화를 따라갔다. 신경 쓰느라 좀 피곤하긴 했지만 간밤의 파티에서 와인도 마시고 치즈도 곁들이다니. 그야말로 자유를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