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면 언젠간 알아봐 주겠지
새로 옮긴 반은 미국인 1명, 러시아인 1명으로 구성됐다. 사는 곳은 이탈리아이고 1달 정도 여기에서 수업을 들을 예정이라고 했다. 둘은 신혼부부로 장기 신혼여행을 왔다고 한다. 유럽은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신혼여행을 이렇게나 오래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길거리의 사람들에게서도 이상한 여유를 느낀 적이 많았다. 좁은 골목에서 차가 사람을 앞지르는 경우는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도 차는 사람에게 길을 양보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바빠도 긴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 안부를 묻는다. 수업이 끝나고 금빛 다이어리를 펼쳤다.
"와 다이어리 정말 멋있어요."
부부가 말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영어로 말한다.
"감사합니다. 저한텐 부적 같은 거예요."
"부적이요? 부적이 뭔가요?"
"아 수호신 느낌?"
"아하. 어쩐지 블링블링한 금색이더라니! 어쨌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다음에 만나요."
부부가 나가고 밥집을 찾아봤다. 열정적으로 떠들며 수업에 임했더니 금방 허기가 진다. 간단하면서도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식당이 어디 없으려나. 금빛 다이어리에 있는 식당은 별로 당기지 않았다. 웬만하면 동양인이 없는 곳으로 가고도 싶었다. 생각보다 동양인이 많아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들과만 어울릴 순 없었다. 나는 구글링을 해서 찾아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 앉은 지 1시간도 넘었지만 아무도 주문을 받지 않았다. 손을 들고 주문을 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혹여나 내가 온 것을 잊었을까 종업원을 쳐다보고 웃음일 짓기도 했지만 그들은 나를 모른 채 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어느 정도지 더 이상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나는 계산대로 가서 주문을 하고 싶다고 스페인어로 말했다. 그러나 종업원은 내게 화장실만 안내해줬다. 기분이 상했다. 결국 손만 씻고 가게를 나왔다. 그때 보인 익숙한 실루엣. 이사벨이다. 하우스 메이트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잘하는 친구이기도 해서 나는 당당하게 아는 척을 했다.
"이사벨!"
이사벨이 뒤를 돌아봤다.
"은? 여긴 어쩐 일이야?"
"배가 고파서 밥 먹으러 왔는데, 먹진 못했어. 하하."
"여기 유명한 곳이잖아. 근데 왜 밥을 못 먹었어? 무슨 말이야?"
"1시간 정도 앉아있었는데 바쁜지 주문을 안 받아주더라고... 하하.."
"아... 그랬구나. 혹시 지금 스케줄 있니? 없으면 같이 펍이라도 갈래?"
이사벨과 야외 펍에 앉았다. 여기서 저녁을 때워도 무방했다. 오징어 요리와 생선 튀김을 시켰다. 모두 이사벨이 추천해준 음식이었다. 이사벨은 능숙하게 맥주 두 병까지 시켰다.
"자주 오는 곳이야?"
내가 물었다.
"응. 친구들이 추천해줬거든."
이사벨은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하긴 모국어가 스페인어라 모두와 어울리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영어까지 유창하니. 종업원이 맥주를 가져왔다. 나는 목이 말라 맥주를 들이켰다. 갈증엔 차가운 맥주가 정답이다.
"아까, 기분 많이 나빴겠다."
이사벨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 응. 바빠서 주문을 안 받은 건 아닌 것 같아. 사실 내가 나중엔 직접 가서 주문을 요청했는데도 화장실만 안내해주더라고. 뭘까, 싶었지."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사벨에게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동양인이라서 무시한 거 같아."
"뭐?"
맥주를 마시다 뱉을 뻔했다. 설마 차별이겠거니 싶었는데 진짜란 말인가. 어렸을 적부터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자주 갔지만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겪은 적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준비한 완벽한 계획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래서 금빛 다이어리에만 있는 식당으로만 갔어야 했다.
"여기 은근히 인종 차별 심하거든. 나도 몇 번 당했어."
"너도?"
이사벨은 겉보기엔 스페인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응. 말투에서 남미 냄새가 난다나 뭐라나. 같은 스페인어라지만 콜롬비아인이 쓰는 스페인어와 현지 사람들이 쓰는 스페인어가 다른 거지. 내 말은 방언 취급해. 따지고 보면 스페인 나라 자체에서도 사투리가 얼마나 다양한데. 여기가 수도라서 그렇지 다른 지방만 가도 방언 차이가 엄청나거든."
"그랬구나."
"조심해. 만만해 보이면 안 돼. 그 옷부터 어떻게 해 봐. 안 덥니? 아무리 리넨이라지만 팔을 다 덮고 있는 걸."
"그런가..."
나는 괜히 소매를 쭈뼛쭈뼛 걷어 올렸다.
"최대한 스페인 사람처럼 하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근데 너, 메이크업은 되게 잘한다. 혹시 지금 갖고 있는 화장품 있니? 구경하고 싶어."
나는 재빠르게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이사벨은 내 화장품들을 식탁에 올려놓고는 예쁘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이것저것 만졌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너 가져도 돼. 이거 너랑 어울리겠다."
나는 흔쾌히 이사벨에게 새 화장품을 줬다.
"진짜? 고마워! 한국 화장품은 여기에서도 인기가 많거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다양한 종류는 처음 봐!"
아이처럼 좋아하는 이사벨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우리는 펍에서 나왔다. 이사벨에게 할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백화점엘 갔다.
'최대한 스페인 사람처럼 하고 다니랬지.'
제일 유명하다는 스파 브랜드로 들어갔다. 마네킹과 사람들의 옷차림을 둘러봤다. 그들과 비교해보니 내가 더워 보일만도 했다. 사람들은 성별과 관계없이 대부분 소매가 없는 상의와 짧은 바지를 입고 다녔다. 하긴, 해변가 그림 속 여자들도 거의 헐벗고 있었지. 나이가 좀 있는 숙소 주인 마르타도 속옷이 보일 정도의 짧은 치마를 자주 입었다. 노출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사람 몸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헐벗은 듯한 옷을 마구 들고 가 피팅을 하고 괜찮은 것들을 골라 샀다. 순식간에 쇼핑백이 늘어났다. 이 정도면 최대한 현지인처럼 보일 수 있을까. 아까 레스토랑에서 겪었던 적어도 일어나진 않겠지.
와인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새로 사 온 옷들을 입어보며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했다. 한국에서 입었다간 혼만 날만한 옷들 뿐이다. 한 뼘밖에 안 되는 바지에 가슴만 겨우 가리는 상의, 비치 타월 같은 원피스 등을 옷장에 줄줄이 걸어 놓았다. 괜히 뿌듯했다. 새로운 공간에 들인 나만의 물건이라니. 옷 정리가 끝나고 캐리어에 있는 새 화장품을 파우치에 옮길 작정이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이지. 파우치 안에는 화장품이 몇 개 없었다. 맥주도 좀 마셨겠다 이사벨에게 화장품을 너무 많이 줬나 보다. 어쩔 수 없지, 하고는 파우치를 다시 빵빵하게 채웠다. 파우치에 화장품이 가득해야 안심이 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화장이 무너질지 모른다. 제때 화장을 고쳐줘야 메이크업이 하루 종일 쫀쫀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엔 각자의 용품을 아무렇게나 놓고 사용하는데, 어쩐지 내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각질 팩 좀 하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나는 결국 팩을 포기하고 대충 샤워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클래식을 틀고 와인을 한 잔 마셨다. 뒤로 젖힐 수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오늘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교재도 함께 펼쳐서 공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부하다 창밖을 바라봤다. 여름의 스페인은 밤 9시는 넘어야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지금이 딱 그 시간이다. 이 타이밍을 놓칠 세라 재빠르게 화인과 스페인어 교재를 들고 창가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다. '내일이 기대되는 곳.'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자마자 정소영에게 DM이 왔다.
좋냐
참 저답다.
좋다
8시간의 시차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정소영과 연락을 자주 하진 못하지만 이렇게 밤마다 틈틈이 안부를 주고받는 중이다. 정소영이 없었다면 아주 외로운 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우스 메이트들과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이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집중을 하느라 힘들기도 했다. 눈치를 보며 남들이 웃을 때 따라 웃지만 괜한 자격지심이 생겼다. 나도 더 노력하면 그들처럼 잘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보여줄 수 있을까. 내일은 서점에 가서 스페인어 책을 몇 권 사볼까 한다.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보긴 하지만 부족하다. 정소영은 이런 나를 뜯어말리지만 나는 책상 위에서 반짝이는 금빛 다이어리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