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비중국인 동양인

나는 한국인입니다.

by 올대리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원에 일찍 도착했다. 나는 빈 강의실이나 다과실에 앉아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하다 들어간다. 아무리 여행이라지만 놀고먹을 수만은 없지. 프리토킹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왕 온 거 '나 스페인어 좀 한다!'정도의 실력은 쌓고 싶었다. 수업 시간 10분 전, 칼같이 강의실로 들어가 선생님과 학생들을 기다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는데, 첫날 같이 수업을 들었던 중국인 학생들이었다.

"또 보네? 안녕?"

중국인 친구들이 내게 인사를 했다.

"어? 안녕. 근데 어쩐 일이야?"

나는 당혹감을 감추고 물어봤다.

"이 반에 학생 두 명이 빠졌다고 해서 우리가 왔는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어. 반을 옮겼던 거구나? 학원을 등록하지 않은 줄 알았어."

"아 응. 그 두 명은 관둔 거래?"

"응. 그렇다는데? 자세한 건 우리도 몰라. 당장 수업 시간이 바뀌어서 우리도 어제 급하게 들었어. 자세한 건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실 거야."

부부는 하루에 두 시간 수업 듣는 게 버겁다고 그만뒀단다. 신혼여행을 왔는데 학원을 다니니까 놀 맛이 안 난다나 뭐라나. 나 같으면 이왕 길게 휴가 낸 거,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 시간을 채울 것이다. 지식을 쌓는다든가 손이나 몸으로 할 수 있는 뭔가를 배운다거나. 마냥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건 참으로 불안한 일이다. 하루에 십 분이라도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면 나중에 큰 자산이 될 텐데. 그나저나 난 얼떨결에 중국인들과 수업을 듣게 생겼다. 이 학원에서 중급과 고급 실력에 있는 학생은 나와 저 중국인 두 명뿐이라고 한다. 살면서 중국 사람이 내게 피해를 준 적은 없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피하게 된다.




수업이 끝나고 중국인 두 명이 말했다.

"끝나고 일 없으면 밥 같이 먹을래?"

역시나 매끄러운 스페인어다. 그래, 그때도 분명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이 발음이었지.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말씀을 거의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아무렴, 난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채 안됐고 저들은 1년이 넘었으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가만있자. 저들과 친해지면 현지인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주변 지리도 잘 알 것이고 뭔가 도움이 될 것 같은 촉이 왔다.

"좋아. 가자."




그들은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다며 나를 끌고 갔다. 레스토랑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중국 식당이다. 어쩐지 가는 길에 유달리 중국어 간판이 달린 상점들이 많았다. 식당 내 손님은 중국인과 스페인 현지인의 비율이 반반을 이뤘다. 중국인만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끔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그들 사이에서 일부러 큰 소리로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 말했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나를 중국인으로 오해하진 않겠지. 그런데 오히려 옆 테이블에서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사람들이 왜 이쪽을 보는 것 같지?"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딱 봐도 재밌잖아."

"뭐가?"

나는 토끼눈을 하고 물었다.

"똑같이 생겼는데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니까."

말도 안 된다. 나는 한국인이다. 자신 있게 한국에서 왔다고, 중국인이 아니라고 이 자리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그 타이밍에 음식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어떻게든 내가 한국사람이란 걸 오늘 처음 본 식당 손님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오랜만에 만난 밥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물론 빠에야가 유명한 것처럼 스페인 사람들은 쌀을 많이 먹는다. 쌀을 찌면 밥이 되는 건 맞지만 쌀이 무조건 밥을 일컫진 않는다. 한국식 밥과는 엄연히 다르니까. 식당 사장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중국인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중국어로 대화해서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느낌상 안부를 나누는 듯하다. 내게도 말을 걸었지만 나는 중국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게끔 옅은 미소를 짓고는 수저를 들었다. 맛이라도 없기만 해 봐라. 다신 너희들과 사적으로 만남을 갖는 일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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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난 지금 저들과 디저트를 먹는 중이다. 정말 맛있었다. 한국에서 갔던 중식 레스토랑의 중식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파두부도, 해산물 밥도 특유의 감칠맛이 났다. 나도 모르게 고향 음식을 만난 듯 허겁지겁 먹었다. 미각에 일가견이 있는 건가, 지금 먹는 이 케이크도 환상적이다. 달콤한 음식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가 위에 안착했다. 기분이 좋았다. 술과는 다른 종류의 기분 좋음이다. 술은 사람을 몽롱하게 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을 일으키는 반면, 케이크는 눈앞이 또렷해지는 즐거움이랄까. 괜히 눈이 똘망똘망해진 기분도 든다. 스페인의 강한 태양빛이 더 황금색에 가까워 보인다.

"근데, 너 스페인어 되게 잘한다."

숏컷 중국인이 내게 말했다.

"아 정말? 고마워. 실은 여기 온다고 한국에서 공부 엄청하고 왔거든."

케이크를 맛본 나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혼자?"

"아니. 학원도 다니고 스터디도 했어. 물론 혼자서 틈틈이 공부도 했고."

"대단하다. 나는 여기 온 지 1년이나 돼서야 겨우 적응했는데. 지금 스페인어 이렇게 사용하는 거 정말 멋져."

"뭐? 너는 오자마자 잘했을 것 같은데."

숏컷의 스페인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1년만 있었다고 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현지인과 비슷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해야 하나. 학원에서 중급반을 듣는 이유는 따야 하는 스페인어 자격증 시험이 중급 단계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 스페인에서 살았었어. 유학 온 지가 1년이란 뜻이야."

어쩐지 좀 심하게 잘한다 싶었다. 갑자기 되게 있어 보인다. 굳이 현지인과 친해지지 않더라도 저 친구랑 대화를 나누다 보면 스페인어 실력이 쭉쭉 늘지 않을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눈치 없이 스마트폰은 계속 울린다. 아빠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전화를 하신 걸까. 그동안 의심스러운 행동은 안 했는데.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잘못한 게 뭐가 있나 생각했다.

"미안 잠깐만."

나는 양해를 구하고 바깥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은이니?"

"네, 아빠."

"어디니?"

"학교예요."

"어, 마침 잘 됐구나. 학교 사진 좀 보내줄 수 있니? 지금 바로. 건물 외관 같은 거 말고 강의실이나 학생 식당 같은 곳. 너 간 학교에 누가 관심이 있다고 해서 보여주려고. 홈페이지에 세부적인 사진이 없더라고."

"아.... 네... 네, 알았어요. 바로 보내드릴게요."

망했다. 망해도 아주 망했다. 미리 그 대학교에 가서 사진을 찍어 놨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찍어야 되나. 그나저나 이 학교 학생이 아닌데 강의실을 맘대로 들어갈 순 있나. 일단 나는 정소영에게 전화했다.

"야 정소영..."

"뭐야? 목소리 왜 이래?"

"큰 일 났어."

나는 자초지종을 정소영에게 설명했다.

"뭐?"

"교문이나 건물은 그렇다 쳐. 근데 무슨 수로 강의실에서 사진을 찍냔 말이야. 미쳐버리겠다."

"너 지금 학원 애들이랑 같이 있다며. 걔네 유학 중인 거면 학교 다니고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어차피 대학교 내부 다 거기서 거기야. 부탁 좀 해서 걔네 학교에 가보는 건 어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숏컷한테 마음이 살짝 열린 건 맞지만 걔네한테 부탁까지 하면 난 정말 저들과 친하게 지내야 할 수도 있다.

"너 지금 그런 거 따질 때 아니야. 네 아빠가 더 급한 문제라고. 들키면 머리채 잡혀서 들어올래?"

정소영 말이 맞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카페로 다시 들어왔다. 눈치 빠른 숏컷이 내게 물었다.

"은.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뭔데?"

"부탁을 좀 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