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들만의 리그

좋은 무리, 나쁜 무리

by 올대리

숏컷을 따라 대학교에 갔다. 숏컷은 내가 아빠에게 거짓말을 친 바로 그 학교의 재학생이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다. 오히려 친절하다. 거짓말이 들통 날까 조마조마했었는데, 정문에 도착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와, 정말 고마워. 나도 너희랑 같이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응응. 잠깐만, 친구들을 좀 불러볼게."

숏컷은 전화통화를 몇 번 하더니 외국인 친구들을 금세 끌어 모았다. 우리는 순식간에 무리가 됐다. 1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지만 다수가 뿜어내는 힘이 있다. 나는 비록 이 학교의 학생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군중이 되었다. 숏컷은 자연스레 무리를 이끌고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 속에 나를 주인공으로 넣어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 시리!"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숏컷에게 말했다.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어?"

시리가 말했다.

"당연하지. 이름 외우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어?"

보통은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쯤은 쉽게 기억한다. 기억하려고 애쓰는 건 아닌데 그냥 기억이 난다,

"그럼 이제 다 해결된 거야?"

"응응. 한 가지만 더 처리하면 되는데, 잠깐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살게!"

찍은 사진들 속에 정소영만 합성하면 완벽하다. 정소영에게 사진을 보냈으니 이제 정소영 실력만 믿으면 된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기다리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시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엘리트인 모양이다. 사실 이 대학교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스페인 명문대다. 물론 외국인이 입학하는 게 자국민보단 쉽지만 꽤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시리의 삶이 궁금해졌다.

"오!"

정소영이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잽싸게 내려놓고 톡을 확인했다.

"대박! 확실히 금손이야."

나도 모르게 한국말을 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재빨리 시리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너 한국말하니까 되게 발랄해 보인다."

시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래? 성공해서 너무 기뻐.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거짓말을 품에 안고 사는 건 가슴 졸이는 일이다. 별의별 시나리오를 다 생각했다. 아빠한테 들켜서 잡혀가면 어쩌지. 지금 이 자유를 다 빼앗겨버리면 어쩌지. 거짓말을 거짓말로 뒤덮은 꼴이지만 당장 지금의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다. 순환되지 않아 꽉 막혀있던 공기가 이제야 흐르는 느낌이다. 아, 살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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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이스크림 가게를 나왔다. 학원까지 가는 방향은 같아서 함께 이동하는데, 우연히 하우스 메이트들을 만났다.

"은!"

이사벨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이사벨!"

나도 손을 번쩍 들고 반갑게 인사했다. 볼 키스를 하려고 얼굴을 들이대는데 갑자기 이사벨이 얼굴을 뒤로 쭉 뺐다. 그러고는 내 주변을 훑었다.

"아,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네?"

이사벨은 긴 머리 중국인과 시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응. 이제 집에 가려고. 너희들은 어디 가?"

"오늘 마르타가 여름휴가를 갔어. 아직 메신저 못 봤어? 그래서 파티를 해볼까 해서 장 보러 가는 중이야."

이사벨의 말을 듣고 메신저를 확인했다. 마르타는 2주간 휴가를 떠났단다.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으라는 애정 어린 메신저가 와 있었다. 청소는 당분간 청소부가 해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 어디서?"

"우리들의 집에서지! 너도 당연히 올 거지? 장은 우리가 알아서 볼 테니까 너는 가진 술 있으면 가져오고."

이사벨은 말을 마치고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중국인들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 이사벨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왜?"

"친구들이 오면 집이 지저분해지니까 너만 왔으면 좋겠어. 컨셉은 파자마니까 원하는 잠옷을 입고 오면 될 거야."

"아, 알겠어!"

"근데, 너 중국인들이랑 다니는 거야?"

"응? 아, 그건 아니고. 오늘 학원에서 처음 만났어. 딱 하루 밥만 먹은 것뿐이야."

나도 모르게 말이 저렇게 나와 버렸다. 왠지 모르게 비아냥대는 듯한 이사벨의 말투가 속에 있던 나의 진짜 마음을 꺼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구나. 그럼 이따 봐~"

하우스 메이트들은 장을 보러 떠났고, 나는 다시 중국인들과 길거리에 남겨졌다.

"하우스 메이트?"

시리가 물었다.

"응. 오늘 파티할 거라고 장 보러 간대."

"아 그렇구나. 근데 넌 왜 안가? 어차피 우리 다 집에 가는 길이잖아."

그 생각까진 못했다. 장은 저들끼리 본다길래 친구와 함께 있는 나를 배려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같이 가잔 말은 안 했다.

"내 방에 와인이 몇 병 있어. 그걸로 대신하기로 했지."

거짓말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아 그랬구나. 내가 괜히 오해했네."

시리는 민망한지 짧은 머리를 훌훌 털며 말했다.

"뭘?"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야. 확실한 것도 아닌데. 하여튼 오늘 파티 잘 즐기고 내일 학원에서 보자."

그들과 갈래 길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