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쓴 술

문제를 내 안에서만 찾을 때 마시는 술은 진짜 쓴 술이다

by 올대리

나는 방에서 파티에 가져갈 와인들을 챙겼다. 스페인에 와서 생긴 취미가 하나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와인을 하나씩 모아두는 것. 값이 저렴해서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나 초콜릿도 틈틈이 사다 놨다. 파티에 가져가기 딱 좋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학원에서 배운 것들을 복습해야겠다. 하나라도 더 공부해두면 이따 파티에서 대화하는 게 좀 수월해질 것이니. 때로는 단어 하나가 문맥을 파악하는 데 열쇠가 된다. 학원에서 스페인어로 대화할 땐 큰 무리가 없다. 스페인어가 제2외국어인 사람들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다. 원어민에 가까운 실력을 가진 시리도 학원에서 대화할 때는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 사적으로 떠들 때도 상대방을 배려해준다. 그러나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선 배려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독하게 공부해서 알아듣는 것만이 살 길이다.




정신없이 공부하다 보니 벌써 파티 시간에 가까워졌다. 한두 시간쯤 늦게 와도 된다고 했으니 지금부터 준비해도 충분할 것 같다. 나는 책을 덮고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파티에 어울리는 블링블링한 파츠를 눈가에 붙이고 파츠와 어울리는 아이쉐도우로 은은하게 빛을 더해줬다. 조명 밑에선 더욱 돋보일 것이다. 눈이 포인트기 때문에 입술은 코랄 색으로 생기만 넣어줬다. 이젠 의상 차례. 파자마 파티에 어울리는 잠옷이 뭐가 있으려나. 한참을 고민하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실크 잠옷 한 벌을 골랐다. 더운 감이 있지만 오늘의 메이크업과 잘 어울리므로 합격이다. 고데기로 머리에 살짝 웨이브를 준 후 긴 머리를 낮게 묶었다. 일부러 흐트러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옷엔 헝클어진 헤어스타일이 제격이지. 거울을 확인하고 미리 챙겨뒀던 술과 초콜릿을 챙겨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북적북적한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웃음소리도 가득하다. 벌써부터 다 모인 건가. 이런 파티는 더 일찍 가는 건가. 헷갈린다. 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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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악했다. 주방과 테라스엔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이미 취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게다가 내가 냉장고에 모아놨던 치즈까지 모조리 다 뜯겨 있었다. 치즈에 붙여놨던 내 이름이 바닥에서 뒹군다. 잠옷을 입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늦었네?"

이사벨이 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니? 파티잖아."

"하우스 메이트들끼리만 즐기는 파자마 파티라며."

"풉. 뭐야, 그걸 믿은 거야? 장난 좀 친 거 갖곤. 설마 네가 믿을 줄은 몰랐어."

이사벨과 이사벨이 친구들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그들은 나보다 키가 훨씬 커져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나는 발을 비비적 꼬았다.

"거짓말을 한 거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짓말이라니. 네가 중국인들을 데려올까 봐 농담 좀 했을 뿐이야."

거짓말과 농담을 구분하는 이사벨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이사벨은 분명 나를 속였다. 농담이란 말로 상황을 모면하고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나는 주방을 둘러봤다. 네온사인 조명에 비친 빈 술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각자 친구들을 데려와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다. 현실감이 떨어진다. 아침마다 햇빛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던 공간이 맞는지, 이 앞에 있는 이사벨도 내가 알고 있던 이사벨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내 치즈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이런. 네가 파티에 온다고 해서 당연히 허락한 줄 알았지. 미안."

갑자기 다른 생가들도 뇌리를 스쳤다. 그동안 화장실에서 없어졌던 내 물건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텅텅 비어있던 파우치까지. 다 네 짓이었구나. 그간 잘해준 척하면서 나를 이용한 거였구나. 근데 도대체 왜?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지? 나는 이사벨을 한 번 노려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굳게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소리와 비웃음이 귓가에 맴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나 다른 세상이 펼쳐지다니. 그러나 더 이상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 비참했다. 다들 작정하고 뒤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저들과 대화하려고 공부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저들과 함께 마실 와인과 초콜릿을 고른 나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내팽겨진 와인과 초콜릿을 쳐다봤다. 와인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레드와인의 드라이함이 목 끝을 툭툭 쳤다. 인상을 찌푸리고는 초콜릿으로 입을 달랬다. 그럼에도 눈물이 찔끔 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창문 블라인드를 걷고 달빛을 쳐다봤다. 달도 혼자 뿐이네. 별은 많지만 달은 하나다. 별과 달은 한 세트처럼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무수히 많은 별'들'과 하나뿐인 달인데. 우주라는 공간에 함께 있지만 뭐랄까, 그럼에도 달은 혼자다. 나는 휴대폰으로 한국 노래를 크게 틀었다. 몸은 흔들거리며 혼자만의 파티를 가졌다. 즐기면 즐길수록 슬퍼지는 이상한 파티였지만.

와인 한 병을 비워갈 때쯤 시리에게 메시지가 왔다.


파티는 어때?


문득 아까 시리가 오해했다는 구절이 생각나 단칼에 답장했다.


그냥. 속았지 뭐.


시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근데, 넌 어떻게 눈치챈 거야?"

"그게.. 네가 어떤 여자애랑 따로 얘기하고 있었잖아. 그때 네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는 걸 봤어. 찰나였지만 기분이 몹시 상했었거든. 근데 확실한 게 아니라서 너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랬구나. 내 어디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잘못된 건 그들의 행동이지."

울컥해서 더 이상 통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급하게 전화를 끊고는 엉엉 울었다. 억울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용희와 헤어질 때에도 이런 느낌이었다. 단순히 슬펐던 게 다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펑펑 울고 난 직후에 조금이라도 나아졌어야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뭔가를 깨달은 듯 인스타에 들어갔다. 스페인에 오고 나서는 용희의 계정을 염탐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용희의 계정에 들어갔는데 팔로우를 이미 끊은 상태였고, 비공개 계정으로 돌려놨다. 이제 몰래 볼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그때, 이전에 용희가 우리 학교 신보사를 팔로우했던 게 생각났다. 나는 얼른 신보사 계정으로 바꿔 들어갔다. 용희의 계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수였다. 나는 용희의 계정을 보면 안 됐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업로드된 사진이 많았는데, 유독 한 사람에게서만 태그도 많이 됐다. 처음에는 그저 새 여자 친구가 생긴 줄 알았다. 궁금해서 다른 계정도 확인하고 댓글도 보다가 알게 됐다. 그동안 용희가 양다리였음을. 데이트를 하다가 스터디가 생겼다고 뛰어간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 연락이 종일 안 됐던 적도 잦았고. 봇물처럼 튀어나온 기억이 나를 더 괴롭혔다. 아귀가 하나씩 맞을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소름이 돋았다. 그럼 왜 나와 진작부터 헤어지지 않았던 걸까. 나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은 왜 구속했을까. 당장에 만나서 묻고 따지고 싶었다. 화가 났다. 변용희도, 이사벨도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이용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면 왜 나여야만 했을까. 왜 나는 자처해서 먹잇감이 되었을까. 난 뭐가 문제일까. 손이 덜덜 떨렸다. 한국에서의 공포가 다시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짙은 보라색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운 것 같았다. 나는 와인 한 병을 더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