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안 해본 거 해보는 절호의 기회
"아... 머리야..."
골이 울린다.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몸을 겨우 일으켰다. 휴대폰은 어딨더라. 휴대폰을 찾기 위해 방을 두리번거렸다. 가관이다. 와인은 쏟아져있고 초콜릿은 바닥에 나뒹군다. 눈이 부셔 블라인드를 내리려고 창문 쪽으로 갔는데 창가 틀에 휴대폰이 놓여있었다.
'어휴, 이 바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이런 학원에 늦었다. 눈이 이렇게 부신데도 여태 잔 게 신기할 정도다. 거울을 봤다. 사람 몰골이 아니다. 화장도 못 지우고 잠에 든 모양이다. 레드와인을 마셔서 입술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보랏빛 입술에 눈 화장은 잔뜩 번져있다. 드라큘라가 따로 없다. 어제 변용희 때문에 화가 났던 기억은 나는데, 어디서부턴가 기억이 안 난다. 애써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하면 골은 이때다 하고 징징 울린다.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프다. 구석에 있던 생수를 들이켰다. 갑자기 속이 안 좋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게워냈다. 목이 타들어갈 듯이 아팠다. 눈에 실핏줄도 터졌다. 변기 옆에 주저앉아 숨을 천천히 골랐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학원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충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시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학원에 못 갈 것 같다고. 시리에게서 전화가 몇 통 왔지만 나는 휴대폰 전원을 껐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력이 하나도 남질 않았다. 블라인드를 내렸다. 방 안이 다시 밤처럼 캄캄해졌다. 내가 좋아했던 스페인의 태양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싫다.
한두 시간을 더 자고 일어났다. 자고 나니 좀 살 거 같았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픈 걸 보니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바늘을 찾아 손을 땄다. 휴지로 대충 피를 닦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제 몇 병을 마신 거지. 한 병은 쏟았다 치고, 두 병이 비어있는 걸 보니 토할 만도 하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다. 아니, 정신을 잃은 건 다름이 없지. 주린 배를 채우러 나가려고 불을 켰다. 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상하게 방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디서 많이 봤던 곳인데...'
나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방 전체를 조망했다. 한국에서의 내 방이 떠올랐다. 방의 구조나 인테리어는 분명히 다르다. 침대도, 책상도, 옷장도 다 다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 방과 똑같았다. 책상 주변에 붙어있는 수많은 포스트잇, 화장대를 가득 채운 메이크업 제품들, 빠르게 꺼내볼 수 있게 선반에 비치된 스페인어 교재들까지. 여기가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다시 떴지만 그대로다. 여긴 한국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한국에서 도망쳐 다시 한국을 창조한 셈이다. 침대 옆에 있는 금빛 다이어리를 쳐다봤다. 이마저도 똑같다. 괜히 금비 다이어리가 미워서 바닥에 던졌다. 사진 하나가 튀어나왔다. 뒤집어진 세상의 해변가. 내가 스페인에 온 진짜 이유.
수업이 끝난 시리와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시리가 프린트 하나를 건넸다. 오늘 배운 수업 내용이란다. 나는 프린트에 시선을 둔 채 시리에게 물었다.
"있잖아..."
"응?"
시리는 스페인 식 감자 오믈렛을 오물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넌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난 시리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별의별 걸 다 물어보는구나. 물어놓고는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잘해준 적 없는데?"
시리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뭐?"
"내가 잘해줬어?"
천진난만한 되물음이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리도 덩달아 웃었다.
"내 부탁도 들어줬고, 오늘 이렇게 프린트도 줬잖아."
"그게 잘해준 거야? 우리가 마침 함께 있었고, 내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도움이었지. 또 프린트는 수업 끝나고 저녁 먹는 김에 준 거야."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시리가 이어서 말했다.
"난 그냥, 너랑 우연히 잘 지낸 것뿐이야.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네 말이 맞아."
나는 미소를 머금고 감자 오믈렛을 입에 물었다. 이제야 음식이 좀 넘어간다. 정말 맛있다.
"혹시 너 이 근처에서 미용실 간 적 있어?"
내가 시리에게 물었다.
"응. 성공한 곳이 1군데 있어. 그동안 꽤 실패했었거든. 왜?"
"머리를 좀 잘라볼까 해서. 밥 먹고 같이 가줄 수 있어?"
"당연하지."
나는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카락을 내 손으로 직접 잘랐다. 단발로 잘라달라니까 미용사가 내 손에 직접 가위를 쥐어주더니 이만큼까지만 스스로 잘라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가위를 들고 손에 힘을 줬다. 힘없는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바닥은 금세 내 머리카락으로 뒤덮였다. 머리가 가벼워졌다. 고민이 잘려나간 느낌이다. 내 생애 첫 단발머리다. 낯설었다. 늘 어깨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었는데, 이제는 없었다. 한 번쯤은 꼭 하고 싶었던 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머리를 감상했다. 제법 마음에 들었다. 미용실을 나와 시리에게 말했다.
"나 숙소 옮기려고."
"그럼, 당연히 옮겨야지. 같이 알아봐 줄까?"
"아니야. 내가 찾아볼게. 더 이상 신세 질 순 없지."
"네가 무슨 신세를 졌다고 그래.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내가 너보다 스페인에 먼저 왔잖아.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때 많이 힘들었어. 그냥 지나가다가 쓰레기를 맞은 적도 있다니까?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근데, 그때 어떤 한국사람이 달려와서는 쓰레기를 던진 그 사람한테 막 소리를 지르는 거 있지? 한국말인 것 같아서 정확하게 알아듣진 못했지만 촉으로 알 수 있었어. 아 저게 그 위대한 한국 욕이구나."
"뭐? 푸하하 하하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과격하긴 했는지 그 사람이 도망가더라고. 나는 벙 쪄서 그 한국인을 쳐다봤어. 한국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내게 와서 욕을 알려줬어. '씨'로 시작하는 욕이었는데 내가 한국말은 못 해도 그 발음은 좀 좋아.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우리는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크게 웃는 건지. 웃을 때마다 단발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나는 셀카를 찍어 정소영에게 보냈다. 어제 있었던 일도 구구절절 함께.
시리와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젠 단 한순간도 이곳에 있기 싫었다. 심호흡을 하고 현관을 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난장판이다. 널브러진 파티용품 때문에 주방엔 발 디딜 틈조차 없었고 싱크대는 음식물로 꽉 막혔다. 냉장고 문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은 데다가 실링팬엔 풍선이 걸려 작동하지 않았다. 청소부도 청소를 포기했는지 주방 문고리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다. '청소 못합니다.' 나라도 못할 것 같다. 마르타가 휴가에서 돌아오면 놀라 자빠지겠구나. 내 자유도 여기서 끝났다. 다시는 저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침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 마침 정소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전화를 받자마자 정소영은 정체불명의 욕을 쏟아냈다. 시리가 한국인에게서 들었다던 욕도 이와 비슷했겠지.
"어우."
"뭐 그런 애들이 다 있어? 미친 거 아니야? 후 일단 됐고, 너 머리 진짜 잘 어울려."
"그래? 다행이다. 큰 맘먹고 잘랐는데."
"근데 이것도 됐고, 나 너한테 할 얘기 있어."
정소영이 갑자기 무게를 잡는다. 무섭게 왜 이러나 몰라.
"뭔데?"
"변용희 말이야."
"응. 내가 캡처 보낸 거 봤어? 양다리였던 거 진짜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하니까 또 갑자기 화가 난다."
"아아 일단, 너 그때 기억나?"
정소영이 내 화를 끊고 물었다.
"언제?"
"변용희가 옷 사줬다고 인스타에 올린 날. 내가 전화했을 때 너 이미 데이트 끝나고 혼자 쇼핑 중이라고 했었잖아."
"어어. 기억 나."
"나 그날 우리 학교 근처에서 변용희 봤었거든. 다른 여자애랑 데이트하고 있더라고. 진짜 누가 봐도 그냥 데이트였어. 스킨십도 있었으니까. 근데, 네가 그날 이후로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말 못 했어. 미안하다."
"하."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버스 정류장도 제대로 못 찾아간 거였다. 그걸 귀엽다고 생각한 내가 미친년이다.
"괜찮아? 그래서 머리 자른 건 아니지?"
"그것 때문은 아닌데, 기폭제가 된 건 사실이지. 계속 자르고 싶었어. 근데 그 자식이 하도 긴 머리 타령해서 안 잘랐었던 것도 있었지. 사실 자를 자신도 없었고. 아 몰라 복잡해. 이젠 그 새낀 내 세상에 없는 놈이야. 내 머리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좋아. 바로 그거야 김은! 바로 그 태도라고!"
"앞으로 나 답답하게 행동하는 거 있으면 말해줘."
"풉 알겠어. 근데 너 계속 그 집에 있을 거야?"
"미쳤냐. 더 가관인 거 보여줄까?"
나는 주방 사진을 찍어 정소영에 보냈다.
"너 거기서 당장 나와. 이건 뭐 진짜 심각하네. 생활권 침해 수준이야."
"그러려고 지금 다른 숙소 알아보고 있어. 에이비앤비 말고 가정집으로 들어가 볼까. 그동안은 문제없었는데, 이번 일 때문에 좀 그렇네."
"너 미리 돈 냈지? 그거 다 받아라."
"뭐? 이미 낸 걸 뭘 받아. 내가 싫어서 나가는 건데."
"말은 바로 해라. 네가 싫어서 나가는 게 아니라 걔네가 널 나가게 만든 거야."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줄 알았다. 똥을 만든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르타가 지금 휴가 중이야. 돌아올 때까지 난 절대 못 기다려."
"누가 기다리래? 너 지금 찍은 사진, 그대로 마르타한테 보내. 미안해서라도 돈 바로 입금해줄 걸?"
과연 정소영 말이 맞았다. 나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집안 곳곳을 찍은 사진과 그간 있었던 일을 마르타에게 메신저로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고 마르타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미리 지불했던 돈을 입금해줬다. 나는 즉시 방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