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녕, 낯선 세상

너무 예감 좋은 날

by 올대리

햇빛이 여전히 강한 스페인의 아침, 새 숙소에 도착했다. 부부와 아들이 사는 가정집으로 나는 화장실이 딸린 큰 방을 쓸 예정이다.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문득 정소영네 집이 생각 나 웃음을 지었다. 지하철 역이 가까워 이전 숙소보다 위치가 더 좋다. 무엇보다 시리의 집도 가깝다. 그 덕에 짐 옮기는 걸 시리가 도와줬다. 고작 한 달 좀 넘게 살았을 뿐인데 그새 짐이 늘었다.

"천천히 짐 정리하고, 이따 저녁에 식사 같이 하는 거 어때요? 괜찮아요?"

주인아주머니가 말했다.

"네 좋아요."

내가 대답했다.

"괜찮다면 친구 분도 오세요. 와서 같이 먹어요."

주인아주머니가 시리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따 뵐게요."

시리가 웃으며 답했다.




나는 홀로 방에 들어가 짐 정리를 시작했다. 시리가 도와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를 오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한국에서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나는 가방에서 해변가 사진을 꺼내 방에 들어왔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였다. 가까이에서 그리고 멀찍이서 쳐다봤다.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스페인에 온 이유를. 스페인어 공부는 목적보단 도구에 가까웠다. 나는 갖고 있는 스페인어 교재를 모두 꺼내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자물쇠로 잠그려던 찰나 금빛 다이어리가 시야에 걸렸다. 나는 아직은 낯선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계획이 빼곡하게 쓰여있다. 필통에서 빨간 펜을 꺼내 모든 계획에 엑스를 쳤다. 금빛 다이어리는 더 이상 빛나 보이지 않았다. 캐리어에 다이어리까지 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보이지 않게 옷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나머지 짐은 금방 정리됐다. 물 한 잔 마실까 해서 주방으로 갔는데, 아까 못 본 남자애가 있었다. 주인집 아들인가 보다.

"안녕?"

남자애가 인사했다.

"응. 안녕."

"네가 은이구나. 엄마 아빠한테 얘기 들었어."

내 이름을 단숨에 외우다니. 게다가 정확한 발음이다. 대부분은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응 혹인 인으로 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 응. 이름 기억해줘서 고마워. 넌 이름이 뭐야?"

"호세."

스페인엔 호세가 정말 많다. 지훈이나 민지쯤 되는 이름인가.

"만나서 반가웠어 호세. 난 짐 정리를 마저 해야 해서."

"나도 반가웠어. 이따 저녁에 보자."

자식. 눈빛이 깊은 게 꽤 잘생겼다. 고등학생이 벌써부터 완성형 미모라니. 한국에서는 대학생은 돼야 미모에 꽃이 피어나는데, 여기 사람들은 성장이 빠른 모양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내고 잠깐 침대에 앉았다. 푹신푹신하니 느낌이 좋다. 머리가 짧아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쉽게 마른다. 거울을 보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었다. 아직 어색하지만 마음에 든다. 그나저나 학원에 안 간지 벌써 3일째다. 어차피 내일이면 수강 기한이 끝나 재등록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잘 됐다. 앞으로도 안 갈 거니까.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인스타를 삭제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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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시리가 도착했다. 시리는 주인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들고 있던 와인을 선물했다. 나도 얼른 방에서 와인을 가져와 내밀었다. 부부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우리는 와인을 밀어붙였다. 시리는 내 방에 화분도 하나 놓아줬다. 식물을 기르다 보면 쳐다보면 것만으로 기분 좋을 때가 있단다. 어쩔 땐 애정 어린 눈빛만 줘도 식물이 쑥쑥 크는 걸 볼 수 있다고도 했다. 나와 시리와 호세는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도와 음식을 날랐다. 거실 테이블에 금세 음식이 가득 찼다. 모짜렐라 치즈부터 브리 치즈까지. 생김새가 다른 치즈들이 한쪽에 놓여있고, 화려한 모양의 타파스들이 그 옆을 줄지어 섰다. 손바닥만 한 바게트 위에 해산물, 고기, 과일 등이 올라가 있었다. 얼음 바스켓엔 맥주와 화이트 와인이, 선반 위에는 레드 와인이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화룡점정으로 은은한 조명을 켜고 불을 껐다. 음악을 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짜 파티다. 이게 파티지. 마음이 편하다. 누구와 친해지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었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었다. 그저 맛있는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녹아들면 그만이었다.

"혹시 블랙핑크 본 적 있어?"

호세가 물었다.

"아니."

"한국에 있으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응. 콘서트에 가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들어."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호세는 K-POP을 좋아하는데, 한국 노래를 틀어 따라 부르기도 했다. 어눌한 한국말이 귀여웠다. 모두가 호세를 보고 웃었다. 이 파티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다.




시리가 일어날 시간이 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같이 나가자. 저기 앞까지만 데려다줄게."

내가 시리에게 말했다.

"그래. 고마워."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시리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은!"

호세가 우릴 뒤따라 나왔다.

"응? 무슨 일이야?"

"밤길 위험하다고 엄마가 너희 데려다주라고 그래서."

"늘 다니던 길이라 괜찮은데."

시리가 말했다.

"이왕 나왔으니까 같이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시리를 데려다주고 호세와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나는 하늘을 보며 걸었다.

"위를 보면서도 걸어?"

호세가 말했다.

"그냥 걷는 거지 뭐."

"풉. 근데 넌 원래 단발머리였어?"

"아니. 며칠 전에 여기서 잘랐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왔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워낙 잘 어울려서 태어날 때부터 단발인 줄 알았지. 예쁘다."

"그래? 고마워."

기분이 좋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예의상 한 말도 아닌 것 같고. 단발 얘기만 하다가 집에 도착했다. 호세는 가끔 못 알아듣는 나를 배려해 천천히 그리고 정확한 스페인어로 말했다. 영어는 전혀 못한다고 하니 이 집에서는 스페인어만 사용하게 될 것 같다. 내내 떠들다 보면 듣는 귀도 말하는 입도 자연스러워지려나. 호세와 나는 주인 부부를 도와 정리를 마무리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하루가 끝이 났다. 3일 안에 새 숙소를 구해 이사를 오고 파티까지 즐기다니. 새하얀 침대로 기어들어가 몸을 비볐다.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일어날 것 같다. 느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