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화분의 진짜 주인

들고 있는 사람이 임자지

by 올대리

일주일이 흘렀다. 더 이상 스페인어 학원엔 가지 않지만 중국인 친구들과는 잘 지내고 있다. 덕분에 대학교 투어는 물론 맛집까지 섭렵할 수 있었다. 그들이 공부하는 동안엔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고 일기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인아저씨와 마트에서 장도 보고 요리를 하기도 했다. 이 집의 진정한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손만 거치면 음식 맛이 살아났다. 호세와도 부쩍 친해졌다. 한국 음악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가사를 묻기도 했고, 함께 저녁을 먹을 때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말하기도 했다. 사소한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여 편안함을 줬다. 평화로운 나날들의 연속이다. 그러고 보니 스페인에 와서는 가스 활명수를 마신 적이 없다. 손만 몇 번 땄다. 마음도 몸도 체하지 않는 순간이 오긴 오려나. 나를 괴롭혔던 소화불량이 사라지다니. 늘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매일 하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에 들었다.



내가 횡단보도에 서 있다. 빨간 불이다. 거리가 혼잡한지 교통경찰이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서서 교통정리를 한다.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손에는 야광 봉을 들고 있다.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교통경찰이 야광 봉을 높이 쳐들고 호루라기를 분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직진하던 차량들이 일제히 멈춰 선다. 이제 건너도 될까. 나는 신호등을 봤다. 여전히 빨간 불이다. 그런데 차들은 왜 멈췄을까. 교통경찰은 차들이 멈춰 있는 정지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허리를 숙여 뭔가를 들어 올렸다. 차에 치여 널브러진 고양이였다.

"으악!"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꿈이었구나. 꿈이기엔 너무 생생하다. 나는 물을 마시려고 몸을 일으켜 선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으악!"

나는 또 소리를 질렀다. 문 앞에 호세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어두워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분명 호세다. 그리고 내 방문은 열려있다.

"너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이불로 몸을 부랴부랴 가리며 물었다.

"아, 미안. 깼어?"

호세가 태연하게 말했다. 쟤는 무슨 생각인 걸까.

"뭐라고? 거기서 뭐 하냐고 물었어."

"쉿. 나 몰래 온 거니까 조용히 말해."

검지 손가락을 제 코에 대고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밤중에 내 방에 몰래 올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당장 나가."

호세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심장은 쿵쾅거렸다. 이불속에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할 얘기가 있어."

호세가 다가오며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나가."

내 목소리는 이윽고 떨리기 시작했다. 제발 이대로 나가줬으면, 하고 바랐다.

"내 얘기만 들어줘."

호세가 더 가까이 왔다.

"제발. 나가. 부탁이니까, 나가 줘."

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호세가 무서웠다. 아무리 고등학생이라지만 덩치가 큰 남자였다. 이 밤중에 원치 않게 내 방에 단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을 준다. 호세는 이를 모르는지 계속 내 옆까지 다가왔다. 나는 겁에 질려 침대 옆에 있던 화분을 집어던졌다. 와장창. 화분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사방팔방으로 화분의 파편과 흙이 튀었다. 주인 부부가 달려왔다.




"미안해."

내가 시리에게 말했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던지라고 준 화분이 아닌데..."

"잘 지내라고 준 화분이야."

"근데 죽였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널 위해서였잖아. 아주 뜻깊은데?"

시리를 쳐다봤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새벽에 소동이 있고 곧바로 시리에게 전화를 했다. 시리는 자다가 한걸음에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주인 부부는 호세를 크게 나무랐고, 내게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호세는 나 역시 본인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단다. 마음이 통했고 그래서 잘해보려고 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한 적도 없거니와 호세 역시 내게 본인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아니, 설령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잠을 자고 있는 남의 방에 몰래 들어와 쳐다보고 가도 되는 건가? 몇 번이나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많은 것들이 머리를 스쳤다. 생각해보면 호세는 내게 끊임없이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틈만 나면 내게 스케줄을 묻고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을 매일 했다.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데리러 나왔고 저녁을 손수 차려주기도 했다. 한국 음식을 사 와 선물로 주기도 했고. 그런 호세가 부담스러웠지만 거절하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불편해도 꾹 참고 미소로 답했었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내가 시리에게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은."

시리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이건 명백한 호세의 잘못이야. 본인이 마음을 표현했을지라도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고 있는 방에 몰래 들어가는 건, 난 범죄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넌 가끔 이상한 말을 할 때가 있어. 피해자가 자책하며 괴로워할 필요는 없단 뜻이야."

정소영처럼 시리도 맞는 말만 한다. 난 지금 시리의 집이다. 새벽에 곧바로 짐을 챙겨 시리의 집으로 왔다. 시리는 괜찮다면 당분간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집 전체를 렌트해 살고 있었는데, 방 2개와 주방이 있는 아담한 공간이다. 시리는 거실에서 소파베드를 끌고 와 자신의 침대 옆에 놓았다.

"오늘은 일단 자자. 혼자 있긴 좀 무섭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거."

시리는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스페인은 한국처럼 비밀번호 키가 상용화되어 있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쇠를 갖고 다닌다. 그래서 예쁜 키링을 많이 파는데, 나도 조개와 불가사리가 달린 키링을 샀었다. 에어팟에 안 달고 열쇠에 끼울 줄이야. 키링을 키링으로 사용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름다운 쓰임새군. 나는 에어팟에 달린 키링을 시리가 준 열쇠에 달았다. 찰랑찰랑 빛난다. 이름대로 있어도 예쁘다.

"방세는 나랑 반반씩 내자."

내가 말했다.

"그렇게 오래 있게?"

시리가 장난치듯 말했다.

"어차피 방 2개잖아. 안 괴롭힐게!"

나는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풉 농담이야. 나 어차피 곧 방학이라 심심했는데 잘 됐다. 방세는 됐어. 1년 치 한꺼번에 냈거든. 가끔 밥이나 사 줘."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게 됐다. 시리의 집은 애초부터 혼자 사는 집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모든 게 1인용이었다. 침대도, 옷장도, 책상도. 나는 의도치 않게 짐을 천천히 풀게 됐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찾아서 꺼내 쓰곤 했다. 다행히 시리가 짐이 많이 없어 화장품을 올려둘 곳은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시리는 화장을 아예 안 한다. 메이크업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관심 자체가 없는 건가.

"근데 넌 화장 안 해?"

"지금은 안 해."

의외의 대답이었다.

"지금은? 그럼 예전엔 했어?"

"응."

화장한 시리의 얼굴이라니. 상상이 안 된다. 처음부터 민낯이었다. 물론 이곳 사람들 대부분도 민낯이다. 비동양인이 민낯인 건 자연스러운데 동양인 여자애가 민낯이라고 생각하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민낯으로 돌아다니는 또래들을 본 적이 없다. 아, 정소영이 있었지. 걔는 특이한 애니까 패스. 대부분이 시험 기간이나 아플지라도 피부 화장과 틴트는 기본적으로 챙긴다.

"왜 안 하는지 물어봐도 돼?"

"음... 귀찮아서?"

하긴, 나도 처음엔 귀찮았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메이크업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등교하기도 바쁜 아침에 꾸역꾸역 화장을 했다. 가만있자, 그 힘들고 귀찮은 걸 잠을 줄이면서까지 난 왜 했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화장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들 하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하곤 넘겼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습관이 됐다. 민낯으로는 집 앞 편의점에 가기도 민망하다. 내 민낯이 싫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낯설어서 쳐다보기 싫었다. 메이크업이 된 나의 얼굴을 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민낯으로 있던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화장을 한 내 얼굴이 내가 아는 나였다. 화장을 하지 않은 나는 진짜 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감추고 숨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커피 마시다 말고."

"아, 별 거 아니야."

"너는 안 귀찮아?"

"응. 이젠 안 귀찮아. 이미 생활이 됐거든."

내가 말하고도 씁쓸했다.

"시리, 혹시 나랑 여행 안 갈래?"

나는 정적을 깨고 뜬금없이 시리에게 제안했다.

"어디?"

"발렌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