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은 여행의 시작과 끝을 알린다. 거미줄처럼 얽힌 철도는 제 나름의 행선지가 있다. 기차의 발판이 되어 여러 갈래로 사람들을 옮긴다. 인파가 북적이는 이곳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기차역이다.
"난 기차역만 오면 배가 고파."
도착하자마자 내가 말했다.
"나도."
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햄버거 먹을래? 여행길엔 햄버거지."
"좋아."
우리는 맥도널드로 향했다. 공항이든 기차역이든 버스터미널이든 맥도널드는 어느 곳에서나 같은 맛을 자랑한다. 전 세계 경제 지표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커다란 햄버거를 와구와구 먹었다. 굶고 나온 것도 아닌데 쑥쑥 잘도 들어간다.
"근데 기차에 짐 넣는 곳이 따로 있겠지?"
나는 오물거리며 시리에게 물었다.
"응. 위에 올려놔도 되는데, 네 캐리어가 너무 커서 앞쪽에 있는 보관함이 더 낫겠어."
"하긴, 타는 사람도 많을 텐데, 짐은 또 얼마나 많을 거야."
나는 기차역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제일 많은 거 같아."
시리가 내 캐리어를 보고 쿡쿡 웃었다. 시리는 딸랑 배낭 하나만 메고 나왔다. 필요한 짐이 저기에 다 들어간 건지, 필요한 물건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네 배낭엔 뭐가 있긴 한 거야?"
"대충 속옷 같은 거?"
"그게 다라고?"
3박 4일이다. 게다가 토마토 축제까지 껴있다. 검색해보니 물안경도 필수라고 했다. 옷을 버릴 가능성이 높으니 여분의 옷도 충분히 챙겨야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파티에 대비해 구두까지 가져왔다. 그 외에 메이크업 도구, 비상약, 마스크 팩, 책 등을 바리바리 쌌다.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쌌는데도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시리는 많이 빠진 듯한 배낭을 갖고 있는데도 어쩜 저렇게 태연 하단 말인가.
시리와 나는 발렌시아 행 기차에 올랐다. 토마토 축제 시즌이라 사람이 무척 많았다. 일찍 탄다고 탄 건데도 좌석 위 짐칸은 이미 꽉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물쇠를 따로 챙겨 올 걸. 캐리어의 잠금장치는 생각보다 허술하다. 공항에서 털리는 일도 자주 있다고 한다. 불안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는 끈으로 캐리어를 묶고 맨 앞좌석 짐칸에 따로 실었다.
내가 스페인에 온 이유. 드디어 발렌시아에 도착했다. 발렌시아는 스페인의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의 항구 도시다. 마드리드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왔을 뿐인데 태양이 더 강하다.
"아우, 더워. 숙소 가서 짐부터 미리 풀자."
시리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그래. 아 맞다, 이거."
나는 시리의 얼굴에 핸디 선풍기를 들이댔다.
"와!"
핸디 선풍기는 시리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혹시 몰라서 한국에서 2개 가져왔거든. 진작 줄 걸 그랬어. 나도 어제 짐 정리하다가 캐리어에서 발견한 거 있지? 애초에 짐을 많이 갖고 오긴 했나 봐. 뭐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사실 네 캐리어 처음에 보고 진짜 놀랐어. 몇 년 살러 온 내 것보다도 훨씬 크더라고."
"그런 네가 이상한 거야!"
시리가 웃었다.
"은. 고마워. 잘 쓸게. 그래서 이렇게 짐이 많았던 거구나?"
"별 것도 아닌데 뭘."
나는 쑥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다 들고 오느라 힘들었겠다. 고생했어."
발렌시아는 마드리드와 느낌이 조금 달랐다. 북적북적하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마드리드와는 달리 발렌시아는 거리의 폭이 넓고 대체적으로 한산했다. 창문에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흰색 옷만 널려있는 집도 있었고, 아기 용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도 있었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열심히 말아서 피우는 여자도 있었고 팔찌를 뚝딱뚝딱 만들어 옆에 쌓아 놓는 남자도 있었다. 길거리엔 오렌지 나무가 가득했다. 우리는 산책을 마치고 시장으로 향했다. 다양한 잡동사니를 파는 그곳은 발렌시아의 최대 마켓이다. 우리는 '멜론 꼰 하몽'이라는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작은 멜론 조각 위에 얇은 생 햄이 올라 간 그 음식은 단짠단짠의 대명사였다. 멜론의 달콤한 과즙과 하몽의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작은 행복에 몸서리를 쳤다.
"저기 옷가게 가보자!"
나는 시리를 끌고 수영복 가게로 들어갔다. 비키니를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스페인 해변가에 가선 꼭 입어보고 싶었다. 가끔 이상한 과감함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시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비키니를 몸에 대봤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나오기로 했다. 나오려던 찰나 출입구에서 삐뽀삐뽀 경보음이 울렸다. 무시하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이 많아 우리도 그렇게 했다.
"잠시만요. 거기 중국인 두 분."
옷가게 점원이 우리를 붙잡았다.
"가방 검사를 해도 될까요?"
점원이 우리의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는 아무 물건도 사지 않았는데요."
시리가 정색하고 말했다.
"네 압니다. 경보음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분명 다른 사람들에겐 가방 검사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만 동양인이었다. 가방을 활짝 열어 보여주고 나서야 옷가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분 많이 안 좋아?"
시리가 물었다."
"어? 아, 응... 좀 그렇네. 많이 티 났어?"
"아니. 갑자기 말이 없길래."
"넌 괜찮아?"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시리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은. 저기 수영복 판다! 아무거나 사서 지금 당장 해변가로 가는 건 어때?"
시리가 제안했다.
"그럴까? 근데 나 필요한 짐이 다 숙소에 있는데..."
"짐이 뭐가 필요해. 수영복만 있으면 됐지!"
전봇대보다도 훨씬 크고 뚱뚱한 야자수가 줄지어 있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사이에 둔, 하늘과 바다가 분간이 가지 않는 곳.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웃고 있다. 여기가 바로 말바로사 해변이구나. 정소영의 언니는 어디쯤에서 그림을 그렸을까. 어디에서 그렸던 그 그림은 탄생했을 것이다. 바닷바람에 단발머리가 날린다.
"옷 갈아입자."
"여기서?"
모래사장 한복판이다.
"뭐 어때. 돗자리로 나 좀 가려줄래?"
나는 수영복과 같이 사온 돗자리를 탈탈 털어 시리를 감쌌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수영복을 입는다. 저 배낭에 수영복도 있었구나. 있을 건 다 있다.
"끝!"
시리는 벗은 옷을 모래에 던졌다. 파란색 비키니가 참 잘 어울린다.
"너도 입어 봐. 괜찮다니까? 주위를 봐봐."
남녀노소 불문하고 거의 다 벗고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여자들도 많았고. 그들은 개의치 않고 몸을 얼굴처럼 드러냈다. 그렇지, 몸은 그저 몸이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시리에게 말했다.
"돗자리!"
태어나서 처음 입어보는 비키니다. 속옷만 입은 것 같아 낯설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배에 힘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리가 내 손을 잡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놀고 돗자리에 반쯤 누워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제야 스페인에 온 기분이다. 날이 저물어 간다. 하늘도 바다도 어둑해진다. 어둑한 해변가를 그림으로 그렸어도 하늘과 바다를 뒤집어 놓았을까. 꼭 닮았다. 데칼코마니처럼.
"너무 좋다."
시리가 말했다.
"나도. 너무 좋아."
진심이었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좋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은 좋다 밖에 없었다. 우리는 아까 사 온 캔맥주를 가방에서 꺼냈다. 미지근해도 맛있다. 미지근한 바닷바람과 잘 어울린다. 소금기를 먹은 바람이 피부에 닿는다. 역풍일 때에는 얼굴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을 정도로 끈적인다. 시리는 손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띠처럼 만들어 머리를 넘겼다.
"풉, 너 웃겨."
"너도 해봐. 머리카락 안 붙어서 맥주 마시기 편해."
나는 시리를 따라 손수건을 돌돌 말았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웃길 거 같다. 우리는 손수건 하나로 꽤 오랜 시간을 웃었다. 모래가 묻은 몸을 돗자리에 완전히 뉘었다. 하늘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나 사실 중국인 싫어했어."
"왜?"
"그게... 나도 생각해봤는데, 이유가 없었더라고."
"그럴 수도 있지."
시리가 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그래서 좋아."
내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아니잖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차별에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어."
살다 보니 생긴 차별이라. 시리의 말이 맞다. 싫어하려고 싫어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싫어하고 있는 거다. 중국인을 싫어해야 한다고 배운 적은 없다. 다만 싫은 티를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봤을 뿐이다. 많이 보다 보니 그 행동에 나도 전염됐다. 혐오엔 이유가 없다. 들리는 말과 보이는 것에 그저 자주 노출되었을 뿐이다. 왜 싫어할까에 대한 고민을 조금만 했더라도 혐오에 동참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