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한 겹만 벗으면 되는데

세상에 당연한 메이크업은 없다

by 올대리

그동안 맛있게 먹었던 토마토는 이제 안녕이다. 아직도 몸에서 토마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우리는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나 몸이 좀 간지러워."

내가 시리에게 말했다.

"더러운 데 있었으니까 그럴 만도 해."

기다란 골목에 모인 수만 명의 인파. 산처럼 쌓인 토마토를 싣고 골목 안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트럭. 마침내 골목은 토마토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토마토를 주워 던졌다. 아프지 말라고 미리 으깨 놓은 토마토였지만 아팠다. 돌덩이도 아니고. 나는 겁에 질려 덩치가 좋은 사람 뒤에 숨었다. 죄송합니다. 이 난동에 골목 양옆에 사는 주민들까지 합세했다. 호스를 끌고 와 사람들에게 물을 뿌렸다. 양동이로 물을 퍼다 나르는 이도 있었다. 축제보다는 난동이란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나중에는 토마토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축제가 끝나고 주민들이 뿌려주는 깨끗한 물에 대강 몸을 헹구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허벅지를 제대로 긁으려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으악!!!"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왜?"

시리가 놀라 달려왔다.

"이거 좀 봐! 나 어떡해!!!!"

허벅지에 알레르기가 돋았다. 상의도 들춰보니 배와 옆구리, 등까지 빨간 반점으로 뒤덮였다. 징그러워서 얼른 옷으로 가렸다.

"당장 약국 가자."




약국에 도착했다.

"토마토 축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약사가 연고를 건넸다.

"일주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발라주세요."

이런 사람들이 많단다. 나만 그런 줄 알고 놀랐다. 약국 안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연고를 꼼꼼하게 발랐다. 다시 봐도 징그럽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약국에서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시리가 벤치에 앉아 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자전거를 탄 남자아이들이 시리에게 레이저를 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큰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나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시리가 빨랐다. 시리는 그들이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이나 가던 길 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했다. 원어민 같은 시리의 스페인어도 한몫했고. 나와 나눌 때 썼던 그 언어가 아니었다. 우리는 주로 스페인어로 대화한다. 나를 배려해 시리는 친절하게 발음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리는 스페인어 특유의 빠르고 센 발음으로 그들에 말을 퍼붓고 있었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소리 낼 수 있는 건가. 누구와 대화를 나누느냐에 따라 말을 조절할 수 있다니. 정말 멋있다. 자전거 군단은 사라졌다.

"괜찮아?"

시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응."

내가 알던 시리로 돌아왔다.

"넌 괜찮아?"

"응. 약 바르고 나왔어."

난 대답하며 연고를 들어 보였다. 그때, 시리의 팔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어? 너도 알레르기가 난 것 같아."

"아, 괜찮아."

"너도 연고 발라. 빨리 없어져야지."

"시간 지나면 없어질 텐데 뭘, 빠르든 느리든. 재밌었으면 됐어."




커튼을 덜 쳤나, 햇빛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바닥만 보면 누가 레이저를 쏜 줄 알겠다. 어제 자전거 군단이 쏴댄 것과 비슷하다. 어제 어떻게 잠이 든 건지 기억이 안 난다. 토마토 사이를 헤치느라 피곤할 만도 했다. 또 안 씻고 잔 모양이다. 스페인에 와서 안 씻고 자는 버릇이 생겼나.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씻고 잤었는데, 확실히 이곳에 와서 느슨해졌다.

"일어났어?"

"응. 어디 갔었어?"

"빵이랑 커피 사 왔어. 먹자."

시리는 크루아상과 따뜻한 라떼를 흔들었다. 이 센스쟁이.

"은. 플라멩코 공연 본 적 있어?"

"아니!"

"이거 봐봐. 아까 카페에 빵 사러 갔다가 본 거야."

시리가 전단지를 내밀었다. 화려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붉은 장미를 머리에 꽂은 한 여인의 자태. 그 옆에서 기타를 치는 올백머리의 남자. 전단지만 봐도 두근거렸다.

"우리 같은 여행자들을 위해서 준비한 이벤트래."

"와 플라멩코 학원 같은데, 이런 것도 하는구나."

"같이 공연도 보고 파티도 즐길 수 있대."

"우와!"

할 일이 정해졌다. 혹시 몰라 챙겨 왔던 드레스와 구두가 쓸모 있는 순간이었다.




"준비 안 할 거야?"

메이크업을 다 마친 내가 시리에게 물었다.

"난 다 했어."

시리는 침대에 누워서 대답했다.

"머리는 좀 빗지 그래?"

나는 침대로 빗을 던지며 말했다. 시리는 누워서 머리를 빗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액세서리를 골랐다. 허리에 스트랩이 달린 꽃무늬 랩 원피스도 입었다. 에스닉한 느낌이 있으니 이왕이면 큰 귀걸이로 해야겠다. 샌들 형태로 된 구두까지 신으니 완벽하다.

"어때?"

나는 한 바퀴 돌며 시리에게 물었다.

"예쁘네. 다했으면 이제 가자!"

시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을 신고 방을 나갔다. 진짜 저러고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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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눈물이 났다. 노련한 박수소리와 구두굽의 경쾌함 뒤엔 이별을 암시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화려하지만 구슬펐다. 같이 본 사람들과 공연 얘기를 조잘거리며 파티 장소로 이동했다. 학원 옥상에서 파티를 진행한단다. 나는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화장을 고쳤다. 기껏 공들여 한 화장인데 눈물이 망쳤다. 파우치를 꺼내 번진 곳을 살살 지우고 입술과 볼에 분홍빛으로 생기를 더했다. 그사이 사람들은 다 옥상에 올라갔나. 나는 치마를 붙잡고 계단을 올랐다.

아름다웠다. 그저 어두운 밤에 조명만 켰을 뿐인데 너무 예뻤다.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 것 같았다. 작은 방울 전구가 모여 밤을 환하게 비췄다. 그 아래 술과 다과가 펼쳐져있다. 산해진미 같은 요리는 아니지만 충분히 멋졌다. 소소함이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나를 발견한 시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은!"

나는 시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hola!"

나는 시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볼 키스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와 옷이 정말 멋져요."

"감사합니다."

나는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다들 엄지를 치켜세우고 스타일을 칭찬했다. 그러나 마음이 이상했다. 항상 언니처럼 주목받고 싶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만 빛나는 언니가 부러웠다. 노력했지만 나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쫓아갈수록 더 멀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언니처럼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지금, 나는 사람들의 관심 속 인물이 되었다. 기분이 좋아야 했다. 이런 게 행복이 아닌가. 나는 와인 잔을 돌리며 파티 사람들을 조망했다. 해변가에 있던 사람들도 이랬는데. 비스킷과 치즈를 먹으며 하하 호호 꾸밈없이 웃는 사람들. 마시고 싶어서 마시고, 먹고 싶어서 먹고, 웃고 싶어서 웃는 사람들. 집에서 방금 나온 듯한 가벼운 옷차림과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도 예뻤다. 그 사이에서 시리도 잘 어우러졌다. 나만 이방인이다. 드레스와 구두가 잿빛처럼 보였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시리와 정소영의 공통점이 있다면 얼굴이 아니라 표정해 주목한다는 점이다. 얼굴을 언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저것 급하게 주워 먹었나 봐. 속이 좀 안 좋네."

나는 괜찮다는 듯 시리의 어깨를 두드리곤 화장실로 갔다. 문을 닫고 거울을 봤다. 이렇게나 내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다. 짙은 화장에 이목구비가 가려졌어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천천히 거울 속의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손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손등에 립스틱이 묻어 나왔다. 손가락으로 눈도 문질렀다. 밋밋한 얼굴이 낯설었다. 민낯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언제였더라. 뒤로 물러섰다. 멀리서 보니 좀 낫다. 그때, 시리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서로를 쳐다봤다.

"깜짝이야."

"뭐해? 속은 괜찮고?"

"응... 근데, 나 많이 이상해?"

뒤를 돌아 시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왜 이상해?"

저 다운 대답이다.

"풉. 됐어. 가자."

나는 화장실을 나갔다.

"어? 이거 안 가져가?"

시리가 파우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맞다."

나는 파우치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리는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따라 나와 말했다.

"은. 우리 클럽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