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각도로 바라보기
꽤 오래돼 보이지만 탄탄한 느낌을 자아내는 빌라 앞에서 정소영이 멈춰 섰다. '402'라고 쓰여 있는 우편함에 손을 넣어 휘젓는다. 우편함이 꽤 높은지 까치발이다. 일상인 듯 속을 보지 않고도 우편물을 잘만 뺀다. 재빠르게 이름을 확인한다. 선택된 몇 장의 우편물만 탈탈 털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계단을 올라간다. 아까부터 우리는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렇게 됐다. 새빨개진 눈으로 말을 먼저 거는 것도 민망했다. 나는 군말 없이 정소영을 따랐다. 삐삐삐삐 띠리링 삐삐삐삐 띠리링 삐삐삐삐 띠리링 띠리리리리. 잠금장치가 요란을 소리를 내며 마침내 해제된다. 이 정도 소리면 고장 난 게 아닌가 싶다. 정소영은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문을 잡아당긴다. 예의상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은 보진 않았지만 몇 번만 아무렇게나 눌러보면 맞출 것 같았다. 4개의 숫자만 흐릿하게 인쇄된 글씨 같다. 살면서 비밀번호 한번 바꾸지 않은 건가.
문이 열리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양한 종류의 신발들이다. 슬리퍼부터 운동화, 구두, 등산화, 부츠 등 현관에 계절감이 없다. 하마터면 지금이 봄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한눈에 봐도 여자만 사는 집이다. 사이즈도 작은 데다 종류에 비해 크기는 다 거기서 거기다. 이렇게 널브러진 신발들 사이에서 제짝을 찾아 신고 나가는 게 용해 보인다. 정소영은 바닥에 있는 신발을 발로 차고는 마침내 제 신발까지 벗어던지고 들어갔다. 나는 문도 닫지 않은 채 현관에 서 있었다.
"누구야? 소진이야, 소영이야?"
정소영의 어머니가 현관으로 걸어오며 묻는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나요, 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정소영은 대답한다.
"어우 내 둘째 딸~"
우리 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애교 섞인 소리다. 현관에서 가족이 맞이해줄 수도 있는 거구나. 나는 여전히 현관에 우두커니 선 채였다.
"어? 누구? 소영이 친구?"
"아, 안녕하세요."
나는 엉거주춤 인사했다.
"어머~ 예쁘게도 생겼네. 어서 와요."
정소영의 어머니가 생글생글 웃으며 반겼다.
"아우 주책이야. 엄마 방으로 들어가셔. 나 얘랑 방에서 놀 거야."
정소영이 엄마를 밀며 말했다.
"무슨 얘기하고 놀 거야? 나도 껴줘."
"왜 이래? 저리 가."
"오호호호호. 학생 왜 그러고 서 있어? 문 닫고 들어 와요. 봄바람 차가워서 추워."
"아, 네네."
나는 문을 닫고 들어왔다.
"뭐 간식 좀 챙겨줄까? 마실 거라도?"
여전히 싱글벙글한 정소영 어머니가 묻는다.
"아 됐어. 오늘 휴가라며. 그냥 쉬어. 내가 알아서 갖고 들어갈게. 야 김은, 너 뭐 마실래? 커피? 주스? 물?"
"주스."
정소영과 나는 각자 오렌지 주스를 한잔씩 들고 정소영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벽에 걸린 큰 그림과 마주쳤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안 가는 반짝이는 해변가.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바다가 위로 하늘이 아래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름과 파도를 구분 못할 리 없다. 대부분 푸른색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다 같은 푸른색이 아니었다. 구름이 없는 하늘,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 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구분되어있다. 늦게 오는 파도, 해변에 도착한 파도, 숨이 죽은 파도 역시 달랐다. 가운데엔 수많은 여자들이 옷을 벗고 누워있다. 아니 땅에 매달려 있다고 해야 하나.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는데도 저렇게 한가롭게 선탠을 즐기다니. 하늘과 바다처럼, 다 벗은 여자부터 실오라기만 걸친 여자까지 다양했다. 현관에 널브러진 신발들이 생각났다.
"잠깐만 기다려 봐. 금방 치울게."
정소영이 급하게 방을 치우며 말했다.
"응."
그림에 정신이 팔린 나는 대충 대답했다. 세상을 뒤집은 저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언니와 엄마를 따라 미술관에 여러 번 갔었는데 이렇게까지 그림에 빠진 적은 없었다. 아래에서 위를 내리쬐는 햇빛, 지나치게 반짝이는 모래알까지. 저긴 어디일까. 저곳에 가면 지긋지긋한 불면증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와."
정소영이 손짓하며 말했다. 덕분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어? 어..."
나는 그림에서 눈을 겨우 떼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림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한지 흰 벽지에서 그림의 잔상을 볼 수 있었다.
"뭘 그렇게 봐? 그림?"
"응. 저 그림 어디서 났어?"
"언니가 그린 거야."
정소영에겐 5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디자인을 한단 얘긴 들었는데 미술을 전공했는지는 몰랐다. 현재는 그래픽으로 돈벌이를 하며 집에서 틈틈이 손으로 작품을 그린다고 했다.
"직접 그리셨다고? 진짜 대단하시다."
"엄청 애먹었지. 저거 그린다고."
"왜?"
"저 해변이 기억이 안 난다고 여름마다 스페인엘 가는 거 있지?"
"저기가 진짜 있는 장소라고?"
"응. 마드리드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했는데. 어디였더라."
"잘 기억해 봐. 언니가 그렇게 자주 갔다면서 이름도 모르면 어떡해."
나는 괜히 보챘다.
"발... 발... 아!! 발렌시아!"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정소영이 유레카를 외치며 기억해냈다.
"발렌시아?"
"3년은 왔다 갔다 했을 거야. 3번 정도 간 거지. 3개월씩."
"진짜 멋지다. 직업이 있는데도 그게 가능하다니."
"프리랜서 디자이너거든. 가서도 일하는 것 같더라고. 우리 언니만큼 팔자 좋은 사람도 없어. 완전 부러워."
정소영 네가 할 소린 아니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그 이후에도 그림과 스페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너 요 근래 제일 말똥말똥하다?"
정소영이 말했다.
"아... 내가 그랬나."
많이 들떠있었나. 들킨 것 같아 창피했다.
"뭘 또 갑자기 풀이 죽고 그래? 보기 좋다고. 얼굴 말고 표정이."
정소영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네 말이 맞았다는 말도 했다. 나는 혼자서만 연애하고 있었다고. 돌이켜보면 나는 연애하는 2년 동안 불안했다. 용희가 나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혼자서만 끙끙 앓았다. 안 그러려고 발버둥도 쳤었는데.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불안해졌다. 그러면 헤어진 지금이 괜찮아져야 되는 거 아닌가. 오히려 두렵다. 그 불안을 다시 가져와서라도 두려움을 없애고 싶다. 밤이면 더욱 고통스럽다. 두려움은 몸집을 키워 나를 삼키려 한다. 두려움에 맞서 싸우기 위해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매일 밤마다 마시게 됐다. 값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옷으로 치장하고 관리를 받아도 얼굴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내게 맞는 건 하나도 없었다.
"너..."
정소영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너무 놀랐다. 정소영이 우는 건 처음 봤다.
"너 지금 우는 거야?"
"아 슬퍼. 너 왜 그러고 살아. 말 좀 하고 살지.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소매로 제 눈을 닦으며 정소영이 말했다. 소매는 눈물과 얼굴까지 끌어당겼다. 그 모습이 웃겼다.
"갑자기 왜 울고 그래 풉. 네가 울면 어떡하냐!"
"너 완전 짜증나."
이후로도 정소영은 계속 울었다. 이상하다. 나 때문에 정소영이 우는데 왜 이렇게 개운한지 모르겠다. 속이 뻥 뚫린 느낌이다. 묵은 때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랄까.
"야 정소영."
"왜"
"나 스페인 갈까?"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