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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Aug 27. 2020

미디어 읽기와 이야기 교육

미디어 리터러시가 필요한 이유

미디어 읽기의 문제


리터러시(literacy)는 문해력,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쓰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글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름의 주관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일상 매체가 많아지면서 미디어 읽기, 즉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우리에게 노출되는 영상물과 다양한 콘텐츠의 특성과 효용, 장단점에 대해 이해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창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또 비판적 소비자로서 건전한 대중문화를 함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준다.


나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 찬성하면서도 그 시작은 이야기(스토리텔링) 교육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좋든 싫든 대중문화 전반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 대중문화의 힘은 다름 아닌 이야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특정 언론사나 이익집단,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잡지 등에서 오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주제나 내용 역시 시사문제와 뉴스의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미디어를 활용하는 단편적 방법, 더 나아가서는 휴대폰을 포함한 미디어는 위험하니 이를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경우도 있어왔다.  


이러한 접근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당파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시사문제나 뉴스에 오르내리는 복잡한 가치판단이 필요한 주제는 기자나 편집자, 혹은 그 내용을 가지고 교육하는 교육자의 특정한 관점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때로는 특정 언론사나 집단의 정치적 성향에 맞춰 교육이 이뤄질 개연성도 높다.


둘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도리어 미디어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거나 예민하기만 한 비뚤어진 대중문화 비판자만을 양성할 수 있다. TV 예능이나 연예인 기사에 특유의 불편함을 내비치는 누리꾼들은 늘 문제가 된다. 그럴듯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지만 실제론 작은 마음의 불편이나 심술을 과장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비판은 불필요한 잡음이고, 버즈(buzz)다. 더욱이 미디어가 음흉한 의도를 숨기고 우리를 조종하려 한다는 생각이 과한 나머지 편협한 비판주의자가 되는 것이 올바른 미디어 읽기 인양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TV 문화 섹션의 칼럼들을 보면 방송상에서의 일부 실수나 표현이 과연 그 정도의 사회적 공격을 받을만한 수위인지 의심하게 된다. TV를 바보상자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휴대폰을 중독과 줄곧 연관시키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미디어 읽기의 사례다.  


괴로움이 아닌 즐거움을 주는 미디어 리터러시


미디어 읽기 교육의 결과가 왜 괴로운 비판과 자기 검열이어야 할까? 왜 미디어나 대중문화가 나를 속이거나 중독시키진 않을까 의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걸까? 더 낫고 올바르며 삶에 유익한 방편은 없는 걸까?


'Q방법론'으로 유명한 학자인 스티븐슨은 미디어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만드는데 일조한 설득과 효과 측정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연구에 의문을 제기했다. 설득과 효과 커뮤니케이션연구는 누군가 메시지를 보내고 이를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지극히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원형적 모형을 가정한다. 만약 누군가 보낸 메시지에 수용자가 반응한다면 그것은 메시지에 대한 효과로 정확히 측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수십 년간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이런 식으로 이뤄져 왔다. 그런데 그는 이게 왜 문제라고 생각했을까?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히틀러와 괴벨스가 라디오와 TV를 통해 펼친 선전선동술은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미디어를 보고 듣는 대중을 시나브로 설득시켜 전체주의를 추종하게 만들 수 있다니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론 권력자들에겐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학자나 미디어 종사자, PR실무자와 마케터들은 줄곧 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설득하고 그 효과를 측정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반응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과연 누군가가 미디어나 선전 콘텐츠를 통해 완벽히 설득될 수 있는가는 학문적으로도 여전히 모호한 영역으로 남아있다.


스티븐슨은 사람들이 뉴스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 그 이유가 정치적 입장을 정하거나 진지한 설득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치인 이야기를 하거나 날씨에 대해 말할 때조차 그냥 사교를 위해, 대화의 재미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설득과 효과로 점철되어, 언제나 경계해야 하고 비판해야 하는 미디어 대신 놀이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새 옷을 입혀주었다. 그는 유희로 세계를 해석한 요한 하위징아의 놀이 이론을 커뮤니케이션에 적용함으로써, 사람들이나 미디어조차 누군가를 설득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대부분은 하나의 놀이로서, 재미로서 존재한다는 시각을 선보였다.


메타-미디어로서의 이야기


미디어는 늘 순수한 의도만을 갖지 않는다. 반대로 늘 악한 것만도 아니다. 어찌 보면 미디어는 가치중립적이다. 미디어를 인간 감각의 확장이라 생각한 마셜 매클루언의 생각처럼 이제 미디어는 지구를 감싸는 거대한 신경망이 되었다. 신경망에 대해 좋다 나쁘다를 따질 순 없다. 매클루언은 전기나 통신회사를 보며, 자신들이 진정한 의미의 미디어 회사인 줄 모르고 전깃줄이나 전구를 만들고 있다고 냉소했다. 인터넷이 나오기도 전인 40년 전 이미 미디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혜안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미디어를 철로에 비유하며 열차 안에 들어찬 콘텐츠와 정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인간의 생활 형태를 결정하는 건 철로지, 때에 따라 다르게 실리는 여행객, 화물, 석탄과 음식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콘텐츠와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하나씩 잘 생각해보자. 철로와 열차와 그 안에 실린 화물이 등장한다. 화물은 콘텐츠다. 열차는 콘텐츠를 실어 나르는 라디오, TV, 유튜브 같은 플랫폼 형태의 각양각색의 미디어다. 그렇다면 결정적 미디어인 철로는 무엇일까? 인터넷 네트워크일까? 무선주파수일까? 그러나 TV나 라디오, 인터넷 플랫폼은 모두 고유의 주파수와 전달 방식을 갖고 있다. 이들 미디어는 큰 범주의 열차로 봄이 정당하다.


철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열차라는 미디어에 대한 메타적 미디어, 즉 미디어 너머의, 미디어 사이의, 미디어 다음의 궁극적인 미디어다. 채트먼(chatman)과 같은 구조주의 서사 학자들은 하나의 서사물에는 스토리가 한 축을 이루고, 이를 TV나 연극, 영화 등 미디어에 맞도록 적절히 표현된 담화 양식으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한편의 이야기가 영화로, 음악으로, 연극과 TV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원소스 멀티유즈로 구현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이들 하부 미디어를 흘러 다니는 메타적 미디어임을 증명해줌은 물론이다.


인간을 매개하는 이야기


현생 인류의 탄생부터 이야기는 시작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간은 모방하는 본능을 타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또한 이야기는 삶의 모방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삶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호모 나랜스(narrans)나 호모픽투스(fictus)와 같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을 뜻하는 용어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현재에 와서는 인지과학의 발달로 뇌구조에 이야기를 구성하는 회로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초기의 대표적인 실험으로 1940년대 프리츠 하이더와 지멜의 실험을 들 수 있다. 몇 가지 도형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화면을 보고도 사람들은 공통적인 이야기를 구성해냈다. 이런 도형의 움직임에 대해 동물이나 인공지능이 과연 이야기를 구성해 낼 수 있을까? 반면 사람은 이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또 다른 예는 초기 영화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가 들어오는 초기 영화는 당시에도 센세이셔널했지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어진 화면으로만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쿨레쇼프는 단절된 몇 가지 이미지를 붙여서 보여주는 실험을 통해서 단절된 영상만으로도 우리의 인지 감각이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적 이야기 구성 능력을 활용한 몽타주 편집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두뇌는 이야기를 좋아하도록 진화했을까?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본능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쓸모에 있다. 쉬운 예로 엄마 말을 반대로 따라 하는 청개구리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만약 이야기란 미디어에 콘텐츠인 '엄마 말씀을 잘 듣자'를 싣지 않았다면 어떨까?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떨어진다. 또 그 말이 오래 남지도 않을 것이다. 또 아이는 누군가에게 이 말을 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이야기라고 하는, 내용을 실어나르는 훌륭한 미디어가 없으면 정보의 수용성, 지속성, 전달성과 보존성이 떨어지게 된다. 반면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미디어에 메시지를 싣는 순간, 이러한 기능들은 되살아나고 더불어 아이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청개구리 이야기를 더 깊이 해석하게 되는 확장성까지 갖게 된다.


이야기는 그런 쓸모에 의해 탄생했다. 인간은 그것을 두뇌의 회로에 오롯이 저장해 놓았다. 러시아의 수백 개 민담구조를 분석한 블라디미르 프로프를 시작으로, 신화에서 공통된 이야기구조를 도출한 조셉 캠벨의 영웅 여행론, 구조주의 서사를 기호학에 도입한 그레마스 기호학,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바이블로 통하는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이론서 등은 이러한 인간 두뇌 구조에 최적화된 이야기를 찾기 위한 방법론들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이야기 교육으로 부터


이야기는 메타 미디어로서 모든 미디어의 원천이다. 또한 인간 본능과 두뇌구조에 내재된 미디어다. 나라는 인간, 타자로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된 읽고쓰기가 이뤄질 수 없다. 모두가 나름의 생각을 갖듯, 모두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이야기가 못 들어줄 정도로 고루하고 판에 박혀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다. 이들은 늘 예상했던 말을 하고, 예상한 것만 보며, 예상되는 나쁜 일을 한다. 그렇게 예상되는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는 일상을 새롭고 즐겁게 만나게 한다. 그것은 좋은 사람, 좋은 미디어, 좋은 콘텐츠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이러한 좋은 이야기가 지향하는 '낯설게 하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활 감각을 다시 갖기 위하여, 대상들을 느끼기 위하여, 돌이 정말로 돌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 예술은 존재한다. 예술이란 대상의 생성을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며, 이미 생성된 것은 예술에 있어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일상은 이미 만들어진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소음조차 똑같아서 눈길 한 번 돌리고 싶지 않다. 그렇게 죽어있는 생활 감각에 생기를 불어넣고 바닥에 구르는 돌멩이조차 새삼 지구가 달과 부딪혀 들끓어 오를 때 생성된, 용암에서 만들어져 내 발끝에서 발견된 돌멩이였다는 낯섦을 발견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고 쓸 수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미디어 문해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 미디어 읽기 능력은  더 이상 뻔한 비판으로 치장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없다. 메타 미디어로서의 이야기 읽기 능력에 기반해 인간을 읽고, 개별 미디어를 읽고 세상을 읽는 낯선 즐거움을 찾는 과정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파성이나 소아병적인 비판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쓰는 즐거움에서 시작된 교육이 절실하다.


그 과정을 통해 발견한, 나만의 매력적인 관점이 드러나는 진짜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미디어와 대중문화도 따라서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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