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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Oct 11. 2015

Chapter2-6 아이는 두가지 길로 여행한다

동화창작 4법칙

캄캄한 방을 지나 책 가져오기


요즘 부쩍 '무시무시한 유령'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아들에게 말한다.

'네 방에 가서 공룡책 가져올래? 자기 전에 읽어줄게...'

아들은 '아빠가 갖다줘~'라고 말하지만, 눈치 없는 아빠는 꿈쩍 않는다.

'그래? 그럼 오늘은 책 읽지 말고, 그냥 자자.'

입을 삐죽이며 아빠를 원망스레 바라본다. 하지만 피곤한 아빠는 벌써 꿈뻑이던 눈을 감으려 한다.

아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발 뒤꿈치를 들고 캄캄한 주방을 지나 자기 방으로 간다.


"아빠 거기 있지?"


좁은 집에서 몇 번이나 큰 소리로 확인하는가 싶더니, 자기 방 불을 켜고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후, '우다다다다' 책을 들고는 쏜살같이 침대로 뛰어온다.


"아빠 여깄어! 내가 가져왔어! 공룡책!"


"와~ 혼자서 불 켜고 책을 찾아 온 거야? 유령 없었어?"


'응!'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아빠는 아들을 안아준다.


아이가 세계를 여행하는 두 가지 방법


짧은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저희  집뿐 아니라 아이가 있는 집에서 흔히 있는 일이죠?

하지만 아주 단순한 일상의 모습에도 이야기의 정수가 숨어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재밌는 이야기는 그 안에 담긴 사건이 재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고 멋진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느라 시간을 보낸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공룡책을 침대로 가져오는 이야기는 대수롭지 않다. 저런 단순한 사례가 어떻게 멋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야기와 동화창작의 법칙들 중 두가지를 배웠다. 망설일 것 없이 훌륭한 이야기의 요소가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야기는 일상을 떠나면서 시작된다(링크)는 것이 첫 번째 법칙이었다. 아이는 침대를 떠나 불 꺼진 자신의 놀이방으로 '떠난다'. 게다가 일상에서 낯선 곳으로의 여정도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일상 '아빠가 있는 안전한 침대'이고, 낯선 곳'유령이 나올지 모르는 불 꺼진 놀이방'이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요소는 잘 반영된  듯하다.


두 번째 법칙은 결핍과 욕망이 있어야 한다(링크)는 점이었다. 아이는 아마도 잠을 자기 싫은  듯하다. 그리고 자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아빠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아빠는 책까지 가져다 줄 마음은 없다. 이 지점에서 아이의 결핍과 욕망이 발생한다. 늦게 자기 위해서든 책을 읽기 위해서든, 아이는 지금 자기 손에는 없는 책을 가져와야만 한다. 심각한 말로 정리하면 캄캄한 방을 지나 책가져오기...는 결핍의 충족을 위한 욕망의 여정이다. ^^


신기하게도 단순한 일상의 장면이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법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주요한 사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 꺼진 방에서 책을 가져오는 여정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아이에게 주어진 임무혼자 힘으로 책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건을 혹 눈치채셨는지요? 바로 아이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두려움과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사건 말이죠...


사건의 두 가지 측면 : 외부와 내면의 여행


모든 이야기에는 '부족한 사람이 떠나는 여정' 외에도 동화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야기의 소재=재밌는 사건'이라는 도식에 집착하다 보니 훨씬 중요한 부분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가 땅의 세계에 사는 왕자님을 사랑하게 된 바닷속 인어공주 이야기를 우연히 떠올렸다고 해보자. 게다가 자신의 목소리를 팔아 다리를 얻게 되었지만, 왕자는 엉뚱한 여자와 결혼하게 된 사건까지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든 작가는 신나게 글을 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화는 별로 팔리지 않았다. 아이들도 심드렁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작가가 오해한 점이 있다.


놀랍게도 이야기에 있어 사건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에서 말한다.

훌륭한 스토리는 적어도 두 방향의 여행-외부로의 여행과 내면으로의 여행-으로 이끈다.


작가가 오해한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환상적인 아이디어나 착상으로서의 이야기 소재는 외부에 있는 사건을 의미하지만, 진짜 감동과 마음의 전율을 느끼는 것은 내면의 사건에 있다는 점이다. 왕자를 사랑하는 인어공주의 복잡한 심경과 깊은 사랑에서 우러난 자기희생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인어공주는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캄캄한 방을 지나 책 가져오기도 마찬가지다. 공룡책을 가져오는 것은 사건이다. 책을 가지러 가는 도중에 블록을 밟을 수도 있고, 공룡책이 놀이방에 없어서 다시 소파로 가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건 자체로 재밌을 수 있는 여정이다. 그럼에도 임무가 부여되면서 출발했기에 주인공인 아이가 임무를 완성하면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끝나고 만다.


반면 내면의 이야기는 임무의 부여단계부터 시작되어, 놀랍게도 임무가 완성된 이후까지 지속된다. 의기양양한 미소와 흥분한 목소리가 말해주죠?


우리는 아이가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이유나, 부족한 아이가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이 모두 '성장'과 관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성장은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성장'은 임무의 완성이 아니라,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동화창작의 세 번째 법칙은 그렇게 완성된다.


동화창작 0의 법칙 : 이야기는 떠나면서 시작된다.

동화창작 1의 법칙 : 주인공에겐 절실한 부족함, 결핍이 하나(1) 있어야 한다.

동화창작 2의 법칙 : 사건은 언제나 두 가지(2) 여정이다.


부모는 성장과 내면 스토리텔링의 전문가다


대학교에서 학생들과 공부할 때 간혹 난처한 상황에 다다르곤 한다. 재밌어야 할 스토리텔링 이론이 전혀 재밌지 않다는 점인데... 특히 '소명의 거부', '고래의 배', '어둠의 바다', '동굴 가장 깊은 곳', '자격시련' 등등... 프로프나 조셉캠벨의 구조주의 서사학, 칼 융의 분석심리학, 그레마스 기호학까지 아우르는 난해한 용어의 바다는 학생들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으로서 교수법을 고민하던 나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아이를 직접 키우고 있거나 키워본 부모라면 이런 개념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제 가르치는 능력의 부족을 성찰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


이야기를 하나의 이론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학생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프라모델 조립의 순서도를 외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보고 또 보고 외우려 해도 외우기 힘들다. 그러나 아이를 곁에 두고 성장, 특히 내면의 성장을 늘 관찰하는 입장에선 이해가 쉽다.


이야기는 성장이란 주제로 정렬되어 있기 때문이고, 우리 곁의 아이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벗어난 이야기지만, 동화창작 DIY란 제목으로 글을 쓰는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성장하는 아이나, 그 아이를 키우는 부모야 말로 스토리텔링의 원리와 창작에 최적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로프와 캠벨, 보글러가 언급한 '소명의 거부'에 대해 설명해보자. 그냥 기계적으로 '아, 순서상 임무가 부여되면 주인공은 일단 거부하는구나...'라고 이해하는 것은 50점짜리 답변이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어떻게 이해할까? 공룡책을 가져오라는 임무를 받은 아이를 보자. 아이는 일단 '임무'를 거부한다. '아빠가 갖다줘.'라고 말한다. 여기서 부모가 보는 것은... 아이가 임무를 거부하는 이유다. 그것은 습관적인 것도, 귀찮거나 피곤하기 때문도 아니란 걸 안다. 아이가 거부하는 이유는 어둠 속에 사는 무시무시한 '유령'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의 내적 갈등의 실체를 직시한다.


이것이 '소명의 거부'란 어려운 용어의 의미다. 공룡책을 가져오는 사건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이야 말로 진짜 사건,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리고 두려움과 결핍의 욕망 사이에서 망설이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조심스럽게 어둠을 향해 발을 떼는 순간, 아이는 모험의 주인공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자격 시련'의 의미다...라면... 어때요... 참 쉽죠?


내면적 사건으로서 '고래의 배'를 여행하는 안내서


그렇다면 내면적 사건은 대체 어떤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걸 안다면, 이야기 창작에 혹은 나와 아이의 삶에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칼 구스타프 융<영웅과 어머니원형>이란 저작에서 '모든 열정 중에 우리에게 제일 알려져 있는 않은 타성'에 대해 인용한다. 그 타성이란 고요한 만족의 상태다. 어머니가 갓난아이의 모든 결핍을 채워주는 상황과 닮아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두 가지다. 어머니는 (또는 아버지는) 아이의 결핍을 채워주고 끝없는 사랑을 주는 존재인 동시에,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어머니의 사랑이 있어야만 성장할 수 있지만, 동시에 어머니 품에만 안겨서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이 딜레마는 성장이란 내면의 사건을 구성하는 핵심축이다. 세계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꿈과 신화, 이야기, 성서 속 수많은 일화가 바로 이 주제를 다룬다. 우리의 선조나 위대한 학자들, 이야기꾼들은 고민했다.


'도대체 사랑과 타성의 감옥에 갇힌 인간은 어떻게 성장하여, 영웅(어른)이 될 수 있을까?'


멀리 찾을 것 없이 답은 자연에 있다. 나비는 애벌레로 오랜 기간을 산다. 그리고 고치를 만들어 번데기가 된다. 새벽에 동이 틀 무렵 고치를 찢고 나온 나비는 날개를 말린다. 햇살이 찬란하게 나비의 몸 구석구석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을  때쯤, 나비는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어린아이로서의 우리는 모두 애벌레와 같다. 하지만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나비(영웅, 어른)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번데기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죽음과 닮은 시간이다. 고치속에서 애벌레 몸안의 모든 장기는 모조리 녹았다가 새롭게 구성된다. 이른바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다. 칼 융은 꿈과 신화의 해석을 통해, 앞서 잠깐 말한 '고래의 배', '어둠의 바다', '동굴'이 상징하는 바를 이와 같은 재탄생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이제 주인공이 처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안다. 그는 평범한 누군가의 아들, 딸이었을 뿐이다. 지루하지만 딱히 부족한 것도 없었던... 타성에 젖은 일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그들은 일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낯선 세계에서 만난 유령, 악당, 사건과 사고 앞에 주인공은... 약해진다. 캄캄한 동굴, 바다, 고래의 뱃속과 같은 심리적 어둠이 사위를 감싼다.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 어머니의 품을 닮은 어둠이다. 그 축축한 밤에 잠겨,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어머니가 있는 고향을 떠올리며 흐느낀다.


스토리텔링 이론에서 말하는 '고래의 배'나 '동굴'은 하나의 이론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영웅이 될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인 '번데기'시기를 뜻한다. 심리적인 동요와 나약함이 극대화되는 시기이며, 두려움에 온 몸이 녹아내리는 단계다. 이 부분의 묘사가 이야기에 감정적 설득력을 전달함은 물론이고 이야기의 성패를 좌우한다.


당연히 아이의 성장이나 우리의 인생살이도 그렇다.


영웅은 언제나 고치를 깨고 나오는 사람이다


영웅은 언제나 고치를 깨고 나온다. 그 깊고 안락한 어둠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대로 머문다면 번데기에 갇혀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알기에, 영웅은 껍질을 깨고 나온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자기극복이다. 성장의 원리는 이러한 반복되는 자기극복에 달렸다.


칼 융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영웅은 어머니에 고착된 자로서 용(龍)이며, 어머니로부터 다시 태어난 자로서 용(龍)을 극복한 자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극복'에 대해 오해한다. 그것을 두려움과 공포의 '부인'이나 이전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연장에는 자기합리화의 그늘이 자리한다. 영웅은 영웅으로 태어난다는 안이한 믿음이 그것이다.


'넌 원래 용기 있잖아!', '넌 외향적이니까 남들 앞에서도 떨지 않는 거겠지.', '원래 타고났잖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칼융이 인용한 격렬한 욕망으로서의 '타성'에 젖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영웅이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내가 구태여 '성장'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고통도,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못난 내 모습을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런 타성은 또다른 이름의 안전함과 안락함이다. 그들은 떠나지 않았기에 고치를 짓지 않는다.


내면적 사건으로서의 자기극복은... 무조건적인 부인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 없이는 안되는...나약함의 인정'과 '공포의 인정'에서 출발한다. 그 오해를 풀지 못한다면 '성장'으로서의 나비는 결코 날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이 세계의 수많은 공통의 신화, 이야기, 꿈이 들려주는 교훈이다.


외부의 여정으로 성장을 판단하는 것


제주도 처가에서 아이가 처음으로 몸을 뒤집었다. 낮잠에서 일어나 목에는 하얀 손수건을 두른 채 나와 함께 방바닥에 누워 있을 때였다.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는 오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두 번째 몸 뒤집기를 녹화할 수 있었다. 그때의 흐뭇함과 감격이라니...


그리고 얼마 뒤 말이라곤 잘 안 하던 녀석이, 파파... 마마...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를 가르친 적도 없는데 파파, 마마라뇨... 신기해라... 돌이 지난 어느 날 부들부들 엉덩이를 떨며 옆 소파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걷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뭔가를 각오한 듯 결연히 입을 앙 다물고 또 걷기 시작했다.


부모로서 엄마 아빠가 기억하는 아이의 성장과정은 모두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몸 뒤집기, 옹알이, 서기, 걷기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부모가 느끼는 감동과 대견함의 정체가... 그 사건들 자체나 시기의 빠르고 늦음에 있지 않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아이마다 늦게 말을 하는 아이가 있고, 늦게 걸음마를 시도하는 아이가 있다. 그것은 모험을 감수하는 성격과 조심성 있는 성격 정도의 차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모험을 감수했다는 것... 바로 그 지점이 감동의 정체가 아닐까?


갓 세상에 나온 아이에게 자신의 두발로 서고 걷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첫 걸음으로서 동일한 감동의 무게를 지닌다. '사람의 작은 발걸음, 인류에겐 큰 도약'이란 말은 달에서 걷는  암스트롱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면의 여정 대신 외부의 여정으로 성장을 판단하는 시점을 맞이한다.


'우리 아이는 벌써 한글을 읽어요... 우리 애는 영어 발음이 어찌나 좋은지... 이번에 1등을 했어요... 좋은 대학교에 갔어요...'


아이의 내면으로 함께 여행하기


공룡책을 가져온 아이를 아빠 안아준 이유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다. 아빠가 외부의 여정으로서 '공룡책을 가져와서' 기뻤을 리가 없다. 아빠가 아이를 안아준 이유는 따로 있다. 아이가 무시무시한 '유령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내면의 복잡다단한 여행을 통해 '작은 성장'을 경험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내면의 여정을 함께하는 방법은 이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숙제 검사나 임무 달성을 확인하는 태도가 아니라, 아이의 내면을 함께 여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뿐이다.


세 번만 보기로 한 '옥토넛'을 세 번 본 다음, 매정하게 아빠가 리모컨으로 툭 꺼버리는 대신, 아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용케도 스스로 TV 전원을 눌러 끄고 돌아서서 아빠를 바라봤을 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아빠는 아내의 웨딩드레스를 볼 때보다 더 놀란(과장된?) 표정으로 팔을 활짝 벌리면 된다. 아이는 뛰어와서 안긴다. 그러면 아빠는 격하게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옥토넛을 계속 보고 싶었을 텐데, 더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아빠랑 약속을 지켰어? 그래서 스스로 TV까지 끄고 온 거야? 스스로 해낸 거야? 쪽쪽쪽!"


아이에게 자기극복이란... 또는 자기극복의 이야기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TV 꺼라... 공부해라! 1등해라!' 같은 부모가 내려준 임무의 달성에 달려있지 않다. 순간 순간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아이의 내면에서 이는 욕구 또는 두려움의 작은 싸움에 주목하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싸움에서 이겨냈을 때의 과정에대해 작지만 과장된 칭찬을 해주는 것... 그 뿐이다.


아이는 작은 승리의 과정을 기억한다.  그때의 성취감은 경험으로 축적된다.


진정한 용기는 나약함과 두려움을 인정할 때 찾아온다는 깨달음... 그리고 엄마나 아빠 품에 안겨있고 싶을 때조차, 낯선 곳으로 떠나야만 다시 엄마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딜레마를 깨달은 바로 그 순간,


아이는,

인간은,

성장한다.





영웅이 걸어가는 삶의 오솔길을 가로막고 그의 상승을 위협하는 모든 장애들은
은밀히 의혹과 회피의 독으로 삶의 용기를 마비시키는 무서운 어머니의 특징을 그림자처럼 지니고 있다. 영웅은 또한 그 장애를 그때그때 극복할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사랑과 생명을 주는 어머니를 다시 얻게 된다.  

<영웅과 어머니 원형> 중 by 칼 구스타프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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