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새들을 위해, 창가에 모이통을 달아놓았다. 새들은 겨울부터 늦은 봄까지 이곳을 열심히 드나든다. 초여름이 되고 번식기가 되면 둥지를 틀고 새끼를 먹이느라 바빠져서 방문이 점차 뜸해진다. 새끼들은 영양분이 풍부한 동물성 먹이가 필요하기도 하고, 신선한 먹잇감이 많아 굳이 이곳을 찾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버드 피딩'은 야생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새들의 먹잇감이 부족한 도시의 겨울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집 근처에서 버드 피딩을 하면 공짜로 자연의 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를 보는 취미를 탐조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새를 가까이하는 문화가 잘 발달한 미국 등지에서는 탐조를 버딩(birding), 단순한 새 구경을 버드왓칭(birdwatching)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탐조란 단순히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새라는 종이 갖는 생태적 특성을 탐구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모이통만으로도 새의 여러가지 재밌고 신기한 특성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박새는 음식에 대한 확실한 선호도를 갖고 있다. 현미쌀, 땅콩, 호두가 들어있다면 박새의 원픽은 언제나 고소한 향과 달달한 맛이 느껴지는 땅콩이다. 그다음은 호두, 쌀 순이다. 박새와 참새는 처음에는 혼자서 먹으러 오지만 이삼일 뒤에는 친구들을 잔뜩 불러온다. 그리고 모이를 먹기 전 '잘 먹겠습니다'라거나, '통이 비었으니 더 주세요'라는 식으로 재잘거린다.
그와 반대로 직박구리는 과일이 원픽이다. 과일을 가장 먼저 배불리 해치운다. 그리고는 남은 음식은 여유를 갖고 천천히 즐긴다. 문제는 직박구리 식사시간이 너무 긴 탓에 참새 군단과 박새 군단의 식사시간이 자주 겹친다는 점이다. 그럴 때면 직박구리는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퍼덕대고 특유의 '꿰에엑'소리를 내면서 작은 새들을 쫓아낸다. 서열상으로 보면 직박구리, 참새, 박새 순인데 머리가 좋기로 유명한 박새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과감하고 재빠른 비행으로 모이를 낚아채가는 방식으로 겨울을 났다. 대견하다.
책에는 많지는 않지만 귀여운 새 삽화가 몇 개 있다.오랜 기간 새를 보아왔던 탐조가(birder) 입장에선 새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동양이나 서양이나 새대가리(bird brain)란 욕이 있는 걸 보면, 날기 위해 가볍게 진화하느라 작은 머리를 갖게 된 새를 얼마나 오해해 왔는지 알법도 하다. 또 굳이 놀리려는 의도는 없이, 머리가 작은 사람을 '조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슬프게도 나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새들의 천재성>이란 책은 생물학, 진화심리학, 교육학, 뇌과학 등의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새의 사회생활, 언어, 시공간 감각은 물론 미학적 감수성까지 정리해 놓았다. 책을 읽다 보면 새라는 동물의 경이로움에 자연스레 '천재'란 말이 튀어나올 정도다. 또한 새들이 살아가는 세계나 진화의 방식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란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정원사새의 이야기를 보자. 정원사 샛과의 수컷은 균형이 완벽한 정원을 만든다. 그리고 자연에서 구하기 힘든, 파란색 물건이나 반짝이는 동전들로 정원을 꾸민다. 암컷이 멋진 집과 명품에 이끌려 정원을 방문하면 2라운드가 시작된다. 수컷은 암컷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 노래를 부르고, 멋진 춤까지 추면서 자신의 매력을 발산한다. 하지만 인간계의 현실처럼 암컷의 심미안과 마음에 들기는 매우 어려운가 보다. 은근히 다가가지 않고 지나친 열정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암컷은 부담을 느껴 떠나버린다. 아... 연애 상습 실패자들은 인간만이 아니었다는 데에 위로가 되면서도 씁쓸함이 감돈다.
하지만 암컷 입장에서는 짝짓기에 앞서, 이 수컷이 미적 균형감을 깨달을 정도로 지적인가, 자신의 파란 병뚜껑을 지킬만큼 강한가, 노래로 상대를 홀릴 만큼 매력적인가, 멋진 춤을 출 정도로 건강한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즉 재력, 지력, 매력을 골고루 갖춘 상대를 까다롭게 고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닌 것이다.
책에 그려진 정원사새의 삽화, 저 텅빈 눈동자에서 실연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인가이 책에는 다양한 새들의 천재성이 그려져 있어 재미를 주지만 예상못한 인본주의 과학의 한계를 꼬집는 부분도 있어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정치사회학적으로는 존엄한 인권을 갖춘 존재이며, 철학적으로는 유일하게 사고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과연 인간만이 사유할까? 인간만이 사랑과 예술을 이해할까? 인간만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며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할까? 그렇지 않다. 책에서는 연구사례를 통해 새들의 사회성, 미적 감각, 장례를 치르며 슬픔을 표현하는 새와 언어를 배우고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 등에 대해 밝힌다.
그럼에도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받는 유일한 종이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벽을 쌓는다. 즉 인간은 다른 종에게서 보이는 사람과 비슷한 특성에 눈을 감는 성향을 갖는다.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이를 사람 부정(anthropodenial)이라고 일컬었다. 따라서 새들이 아무리 창조적이며 도구를 가공하여 사용하는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을 갖고 있어도 그들을 연구할 때는 지능이란 단어 대신 인지(cognition)란 용어를 선호한다. 천재 임마누엘 칸트조차 '인간만이 오직 교육이 필요한 존재'라고 장벽을 세운 덕에 동물도 교육을 한다는 연구는 최근에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결국 생물학을 비롯한 동물 연구는 해당 종의 생태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종에 대한 메타적인 연구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동물 종과 끝없이 다름을 어필하고 존엄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지구의 지배적 인간종으로서가 아닌 생태계속 하나의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은 과연 존엄한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줄박이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는 두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 전부다. '나와 그것'은 관계 맺는 대상을 타자화한 상태다. 그곳엔 이해도 없고 대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을 통해 '나와 너'가 되는 순간 그것은 대화의 상대로 고양된다. 이 관계는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눈으로 체험해 나가기에 인본주의의 그늘을 도저히 극복하기란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자연이 허락한 아름다운 생명들을 '나와 그것'의 관계로 두기엔 이 짧은 생이 너무 편협한 게 아닌가. '나와 너'로 존재할 때만 깨닫게 되는 새 또는 다른 경이로운 생명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을까.
편협한 국수주의처럼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위대한 자연, 천재적인 새나 귀여운 다람쥐만큼 존엄하기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철학이 있다면 우리는 신 앞에서 조금 더 떳떳하게 구원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산에서 곤줄박이가 보인다면 땅콩을 손에 올리고 핸드피딩을 시도해보자. 가벼운 새의 몸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