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

이별한 사람이 읽으면 좋은 책

by 뮤즈노트

엉뚱한 이야기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랑노래를 생각해 본다. 내용은 대부분 사랑했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다거나 사소한 이유로 이별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서로 사랑했다면 결혼해서 파뿌리가 되도록 살면 된다. 또 죽도록 사랑했다면 아량을 보이며 그만큼 양보했으면 간단한 문제다. 그래서 누군가의 이별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사랑하는 데 왜 헤어져?'라며 코웃음을 친다. 주로 진짜 사랑을 못해본 사람들이 그런다.


위대한 사랑이 이별을 맞게 되면, 우리는 일단 외적인 이유를 찾는다. 이른바 인과와 귀책을 찾는 것이다.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지는 효자 효녀가 없는 세대이니, 대부분은 한쪽 혹은 양쪽 모두의 잘못을 꼽게 된다. 그 잘못이란 대개 이해심, 성격, 기질, 아량, 인격, 경험의 부족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덕목은 단기간에 키워지는 게 아니다. 상대를 붙들기 위해, 부족함을 깨닫고 발버둥을 쳐도 찌질함은 껌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별, 다시 후회하는 세월을 한동안 보내다가 문득 깨닫는다. 그 헤어짐은 보이지 않는 힘이 갈라놓은 것은 아닌지.


미셸 푸코가 바라보는 '권력'을 떠올릴 때면 엉뚱하게도 사랑과 이별을 둘러싼 운명의 힘 같은 것이 떠오른다. 운명은 힘이 세고, 착착 계획해둔 역사대로 우리 삶을 진행시키지만 운명의 의도가 무엇인지, 운명 뒤에서 누가 우리 삶을 주무르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 파워, 힘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다. 파워레인저는 다섯 명이니 제쳐두고, 니체와 푸코가 정답이다. 니체는 유명한 힘(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했다. 니체가 힘과 의지(will)란 단어에 꽂힌 것은 이성이 만들어낸 진리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 몹시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니체가 보기에 신이 사라진 근대 이후의 세상은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할 차례였다. 그 인간은 초인으로서, 이성의 맥 빠진 낙관과 신이 없어진 세상의 허무를 뛰어넘고 도덕을 뛰어넘는 자다.


우리는 모두 신이 되어야 한다. 신이 되기 위해선 지금까지 믿고 추앙해온 이성, 과학, 도덕, 종교 따위 모조리 박살을 내야 한다. 진리는 천국처럼 세상너머에 존재한다는 확신, 우리의 이성이 만들어낸 진리에 대한 지식은 모두 유효하리란 생각들을 박살내는 것,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하는 니체가 벌인 일이다. 니체의 이상하고 위험한 생각은 역설적으로 이성의 굴레, 진리의 속박을 벗어나 인간의 주체성과 개별성을 강화시키는 단초를 마련해준다.


예컨대 이성은 진리를 추구한다. 이성과 진리라는 쌍둥이는 듣기만 해도 좋은 것이므로 다른 사람을 계몽시키려 한다. 근대 계몽주의는 교육 시스템을 전제하므로 학교를 만들고 병원을 만들고 군대를 만든다. 이들 체계는 다시 엄격한 규율로 사람을 다스리고 교육한다. 규율로 다스려진 대중은 잘 팔리는 포켓몬 빵처럼 획일화되고 쓸모 있으며 정상적인 제품이 된다. 근대 이후 이성과 과학에 기댄 산업화가 벌여온, 평균화와 노동의 쓸모로 사람을 구분해낸 결과물들이다.


근대의 철학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주도권이 넘어오는 과정이었다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철학은 인간에게서 구조로 주도권이 넘어오는 과정이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있어 주체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이란 구조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본다. 언어철학에서는 언어와 담론의 구조가 인간을 만든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경제구조가 인간을 규정한다.


즉 인간은 그다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판단과 행동, 이성은 무의식과 같은 '구조'가 지배하고 있다. 구조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라면 인간만이 갖고 있다는 그 잘난 이성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 이성과 진리는 쌍으로 박살 나고 만다. 이후 현대 철학은 니체의 망치를 이어받아 주체, 이성, 진리를 가루가 되도록 해체한다.


니체는 무의식처럼 떠도는 힘에의 의지를 등에 업고 스스로 신이 됨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이성과 형이상학이 축조한 신기루 같은 시스템을 파괴해야만 획일하게 구워진 포켓몬 빵으로 소비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인간으로서 삶을 고민한 니체 덕분에 현대철학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푸코는 니체에게서 권력(힘)과 계보학의 정신을 가져온다.

학생 상호 교육 학교의 글쓰기 연습시간 삽화. 만약 외계인이 이 그림을 본다면 인간종은 개미들처럼 특유의 규율이 내재된 집단이라 생각할 것이다

푸코는 근대 이후 포켓몬빵처럼 찍혀 나오는 정상인들을 바라보며 이상함을 느낀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너는 근대적인 시민이 아니지? 그럼 OUT!이라고 외치는 사회는 분명 이상한 것이다.


그가 <광기의 역사>에서 주목한 '미친 사람', <감시와 처벌>에서 그려지는 감옥은 어찌 보면 근대화 기준에서 낙오되고 버려진 자들에 대한 계보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에게서 물려받은 계보학은 역사학과 다르다. 역사학이 표면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원인과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계보학은 역사적 사건 중심이 아니라 기호 해석을 중심으로 한다. 즉 특정 사건 변화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음험한 진실과 트렌드를 파헤치려 한다.


그런데 계보학을 하려면 일단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푸코는 이 작업을 고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푸코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마치 각 시대별 지층을 탐사하듯 사료를 모았고, 그런 작업들 끝에 탄생한 책들이 <광기의 역사>, <감옥의 역사>같은 책들이다.


그렇다면 계보학으로 알아낸, 감옥을 중심으로 한 제도의 변화에 숨은 기호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푸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력이 세련된 인간 통치술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과거의 공개처형, 고문 등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형벌은 비공개 처형, 강제노역 등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다시 더욱 정교화된 규율에 따른 일과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게 함으로써 죄수들이 자동인형처럼 권력에 복종하게 만든다. 이러한 변화는 인과가 아니라 시대별 지층이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듯이 그 시대의 담론에 따라 이뤄진다.


예를 들어, 고문 대신 강제노역으로 대신하게 된 것은 인권적 측면에서 발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입장이라면, 푸코가 보기엔 신체가 아닌 정신을 고문하는 것으로 트렌드가 바뀐 것 뿐이고 그 배후에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교화된 규율에 복종하는 인간은 지식과 뗄 수 없는 관련을 갖게 된다. 규율받는 인간에 대한 지식, 예를 들어 법률이나 언론, 책, 과학 등 은 그 시대의 권력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므로 영원불변의 진리하곤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식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 공리주의자답게 매우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감옥 체계를 만들어냈다.


문제는 단순히 감옥과 수감자로 그치는 게 아니다. 근대화의 대표적인 집단 교육기관을 다시 떠올려보자. 학교, 병원, 군대, 공장과 회사 등은 인간을 쓸모 있는 부속품으로 만드는 동시에 규율에 적응하고 복종토록 만든다. 역사적 지층을 고고학과 계보학적으로 파헤쳤을 때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층 전체를 꿰뚫는 권력과 지식이라는 광물인 셈이다.


벤담이 만든 일망 감시시설, 파놉티콘은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적절한 비유가 된다. 우리는 개인인 동시에 끊임없이 감시받는 사회에 속한 권력의 노예들이고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처럼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놀랍도록 정교하고 세련된 통치기술을 구사하고 있는 권력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니체의 경우에도 힘에의 의지에서 그 주체가 무엇인지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초인이 되겠다는 측면에선 말 그대로 인간에 내재된 어떤 욕망으로서의 힘처럼 느껴지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권력과 힘이 끝없는 투쟁을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 보면 차라리 집단 무의식이나 중력처럼 그냥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푸코 역시 권력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권력의 기원을 특정하진 않는다. 실제로 파놉티콘의 사례에서, 중앙 감시탑에 있는 자가 왕이든, 대통령이든 아니면 지나가던 청소부든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푸코는 권력이 통치자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은 존재하고 점차 세련된 기술로 인간을 속박하지만 그는 권력 체계의 기원이나 정체를 따로 지목하지 않은 것이다. 역사의 모든 지층에서 권력이란 광물이 발견되었다 한들 그것의 의지나 주인은 무엇이냐 묻는 것은 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그 탓에 나는, 니체와 푸코의 권력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엉뚱하게도 사랑과 이별을 은밀히 조종하는, 인간 연애사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운명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인간을 감옥에 가둔 자가 눈앞에 보이는 사법 집행자들일지라도 그들이 권력의 실체는 아니듯, 헤어짐의 탓도 어쩌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이다.


둘 사이의 알 수 없는 위계와 권력 다툼의 결과라 해도 그 권력의 정체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러니 실연당한 자가 해야 할 일은 노예의 도덕인 연민을 떨치고, 니체의 말처럼 성스럽고 건전한 이기심으로 무장하고 즐겁게 살아내는 것이 정답은 아닐는지 책을 읽으며 엉뚱한 상상을 한다.


우리는 삶을 의무나 운명이나 사기로 여는 것이 아니라 실험의 장으로 여기는 가운데 즐겁게 살아가야 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데 하늘왕국은 필요하지 않다.
- 프리드리히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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