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당신이 해야할 것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EBS <집>이란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자연인'의 상류층(?) 버전이라고 할 만 한데, 훌륭한 외관과 디자인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인테리어는 절제되어 있고 따로 난방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단열을 자랑한다. 그곳에서 집주인은 큰 개를 키우고, 화단을 가꾸고, 통창에 비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이런 삶은 부럽다. 풍요롭고 한가하기 때문이다. 행복감이 찾아와야 마땅하다. 시청자인 나조차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간접적으로 행복감을 체험한다. 그런데 이런 삶이 반복된다면 어떨까?
지금은 불과 백여년전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럴듯한 직업을 찾는 게 아니라면, 알바만으로도 기본 생계유지는 가능하다. 사회는 가끔 시끄러워 보이긴 하나,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싸우는 극단의 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상을 위해 투쟁할 필요도 없고 빵 한쪽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될 이유도 없어진 세상은 낙원으로 한 걸음씩 옮기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EBS <집>에 나오는 한가한 삶은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한가함에서 피어난 지루함이다.
니체, 러셀, 주판치치 같은 학자들은 20세기 이후의 위기는 바로 풍요로움속 지루함이라고 생각했다. 풍요로운 서구사회의 젊은이들은 다른 국가의 젊은이보다 불행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안정된 사회의 젊은이는 몰입할 대상이 없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차라리 해방을 위해 과격한 투쟁과 혁명을 하는 사회가 낫다고까지 생각했다. 열의와 몰두할 대상이 있는 삶은 확실히 즐겁다. 그러나 이러한 열의는 불행에 대한 동경으로 빠져든다는 점이 문제다.
불행과 고통에 대한 동경은 윤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기분전환에 몰두하는 인간에게 문화산업 사회는 정교한 모이를 뿌려댄다는 것이다. 즉 만족을 모르는 소비사회로의 촉진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몰입할 대상을 찾아 TV를 켜고 유튜브를 방문하며 SNS에 댓글을 단다. 문화산업은 이들의 지루함을 망각시켜줄 다양한 상품을 제공한다. 영화나 축구 경기라면 그나마 소박한 만족을 주기에 다행이다. 하지만 광고를 통해 없던 수요를 만들어내고 소비를 촉진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지루함과 한가함을 이겨내기 위해 소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비해도 만족할 수 없다는 구조 앞에 좌절한다.
낭비와 사치는 필요 이상의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포만감이 있다. 소비는 포만감이 없다. 소비란 실제로 사용가치에 의해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구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도별로 가방을 구매하는 건 낭비요 사치다. 그것은 어느 순간 됐다는 만족감에 이른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 가방 컬렉션을 갖는 건 다르다.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어 트렌디한 인간으로 보이거나 누군가에게 부유한 기호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만족 없는 소비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소비사회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있을까?
책에서는 하이데거의 지루함론을 분석한 끝에 결론을 내린다. 지루한 삶이 인간에게 내재된 시스템이라면 물건을 있는 그대로 취해야 한다. 즉 사용가치를 생각하며 사치하고 즐기되 기호를 소비하는 삶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책은 다양한 철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말에 가장 가까운 단어는 '음미'가 아닐까 한다.
음식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선 식재료와 요리법에 대한 지식과 미각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맛과 식당 분위기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맛을 모른 채 허겁지겁 배를 채우거나 맛을 즐기기보단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급식당에 드나드는 행위에는 음미가 없다. 음미 없는 삶은 쉽게 기호 소비, 만족을 모르는 인생에 빠지고 만다.
향유할 대상을 누리고 즐기는 삶, 즉 음미하는 삶만이 한가함의 왕국에서 잘 살기 위한 조건이 된다.
"빵만 아니라 동시에 장미도 추구하자. 인간의 생활은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된다" 월리엄 모리스
책을 다 읽은 후,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란 부제에 맞는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의 결론은 지나치게 소박했다. 하루 하루를 음미하는 삶, 존재의 목적을 생각하며 사치하는 인생은 좋지만 구체적인 행동 양식으로 삼기엔 부족함이 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책의 후기에 눈이 갔다.
후기에는 강의를 하며 졸던 학생들이 눈을 번쩍 뜬 이야기, 학생들의 다양하고 재밌는 반응들이 적혀 있었다. 그 학생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와닿는 답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과 철학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 생각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 그런 하루를 음미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이 지루한 일상에 던져진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것.
갑자기 학생들이 보고싶어졌다.
뛰어난 연구나 예술작품 그리고 철학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사실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학생들이다.
-고쿠분 고이치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후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