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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Jun 12. 2024

사나이의 모험 시리즈

울산바위 대모험

우리 집에는 사나이의 모험이란 여행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집에 있는 사나이는 저와 아들뿐이니, 아내는 자신만 떼놓고 가는 여행이라고 매번 서운해합니다.


그냥 둘이 놀아. 난 따라가서 알아서 돌아다닐게.


아들은 그건 사나이의 모험이 아니라고 강경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더 서운해지고 맙니다.


사나이의 모험에선 주로 국밥을 먹습니다


사나이의 모험은 거친 코스로 여행하며 평소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고 터프한 현지 음식을 먹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숙소 역시 비싼 호텔은 가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체크인 후에는 휴대폰을 보든 책을 보든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사나이들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총 3번에 걸쳐 사나이의 모험이 진행됐습니다. 1차는 설악산 소공원에서 출발하여 귀면암까지 왕복하는 코스였습니다. 2차는 눈 내린 겨울, 해발고도 1,262미터 태기산 정상을 다녀왔습니다.


태기산 정상과 상고대


설악산에 갔을 때는 신록이 우거진 5월이었습니다. 소공원 입구에서 산 초록 스카프를 두르고 땀이 나면 계곡물에 세수를 '푸찹찹'하고 걸었습니다. 사나이다운 호방한 세수였습니다. 2차 때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산 중턱에서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먹고, 더우면 나뭇가지에 길게 자란 상고대를 '쩝쩝' 빨아먹었습니다. 평소라면 '더러우니 안돼'라고 엄마가 말렸 행동이니 터프한 모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번 3차는 설악산 흔들바위를 거쳐 울산바위를 방문하는 코스였습니다. 전날 밤 강원도에 도착해 속초 명물인 황태구이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속초 황태구이


평소엔 밤 10시가 되면 침대에 눕지만 숙소에서 새벽 1시까지 뒹글거리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다음날엔 늦잠을 자며 변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즐겼습니다. 소공원 앞 켄싱턴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댔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등산화 끈을 묶고 산에 오를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들아, 산에 갈 땐 언제나 산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단다.
등산화 신고, 폴대를 챙기고, 충분한 물과 초콜릿, 여벌의 옷 등 준비를 잘 갖추는 게 산에 대한 존중의 표시지.


응 알았어요. 그런데 아빠! 지난번 귀면암 갈 때처럼 중간에 포기하면 안 돼!

 

그렇습니다. 1차 사나이의 모험 때 목표지점인 귀면암까지 못 갔습니다. 아들은 이번에도 울산바위 앞에서 아빠가 포기할까 봐 다짐을 몇 번이나 받아놓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인 3차 사나이의 모험이 시작되었습니다.


푸른 신록이 우거진 6월의 설악산은 아름답습니다. 금강산에 가려던 울산바위가 일만이천봉이 완성됐다는 소리에 눌러앉은 이유도 알 법합니다. 아마도 '금강산이 좋다 한들 설악산만큼 아름다울까?'라고 내심 생각했을 겁니다. 함께 사이좋게 걷다가 땀이 나면 꽁꽁 얼려온 얼음물에 생수를 타서 마셨습니다.


와! 얼음물 이렇게 마시니까 계속 시원하네요!  


그렇지. 나중에 여자친구랑 설악산에 오게 되면 얼음물을 얼려 와서 생수를 채워서 건네도록 해. 사랑받는 남자친구가 되는 방법이지.   


아빠 대신 등산가방을 짊어지고 오르는 아들


점점 가파른 계단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울산바위는 무리 같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땀이 나고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할 때쯤 흔들바위가 보였습니다.


역시 흔들바위에 먼저 오른 건 아들. 뒤늦게 올라온 저와 꿈쩍도 않는 흔들바위를 미는 포즈로 기념사진을 남깁니다. 그리고 돌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습니다. 설악산이 '후' 불어준 계곡 바람이 시원하게 몸 구석구석을 씻어줍니다.


아빠, 진짜 시원하고 평화로워... 근데 울산바위 갈 거지?


이미 에너지는 바닥을 가리키고 있지만 아들은 물러설 기색이 없습니다. 일단 약수터에서 사나이들처럼 '벌컥벌컥' 약수를 마시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에 손을 씻습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물에 에너지가 다시 충전되는 듯합니다.


가자! 울산바위로!

호기롭게 외쳤지만 15분 뒤 저는 나무 계단 한쪽에 널브러지고 맙니다. 아들이 등산가방을 받아 짊어집니다. 먼저 올라가라고, 아빠는 뒤쫓아 가겠노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망설임 없이 '응'하더니 다람쥐처럼 가볍게 굽이굽이 산길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포기하고 싶다. 온몸의 근육이 소리를 지른다. 도저히 따라갈 에너지가 없다.'


하지만 사나이로서의 명예가 실추될 수 없기에 천근추를 달아놓은 듯한 발을 옮깁니다. '헉헉' 내뱉는 숨소리가 가빠지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까마귀 울음소리가 베이스처럼 깔립니다. '헉헉' '까으악 까흐흐아악'


고목에 멋지게 앉은 큰부리 까마귀


그때였습니다. 울산바위 계단 한쪽에 여유 있는 포즈로 서 계시던 할머니께서 손짓을 하십니다. '아... 체력이 다해 헛것이 보이나?' 할머니는 망설임 없는 간결한 손동작으로 냉기가 서린 파우치를 열고 팩포장된 주스를 제 손에 쥐어주십니다.


아까 보니까 당분이 부족한 상태예요. 어서 이거 마셔요.


평소라면 '괜찮습니다.'어쩌고 하며 예의 차린 사양의 말을 했을 법 한데 '감사합니다.'란 말과 함께 이미 주스는 목젖을 때리며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차... 차다. 시원하다. 달다. 뭔데 이렇게 맛있지?' 주스 포장을 보니 'OO사과주스, 사과과즙 99.9%'라고 쓰여있습니다. '와 너무 맛있어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쿨하게 말을 받았습니다.


산이어서 맛있는 거지, 집에서 마시면 별로예요


원래 할머니는 백담사에서 공룡능선을 넘을 생각이셨는데 사고 때문인지 고속도로가 막혀서 코스를 변경하셨다고 했습니다. '공... 공룡능선?!' 힘이 넘치던 30대 초반까지도 한두 번만 올랐던 공룡능선을 오르실 계획이셨다니... 숨을 돌리며 찬찬히 살펴보니 할머니에게선 프로의 향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요령 있고 맵시 있게 입은 등산화와 등산복, 중량을 최대한 줄이면서도 마법의 사탕상자처럼 필요한 물품이 척척 나오는 등산가방, 카리스마 넘치는 말투까지.


이 사탕이 도움이 될 거예요. 목이 마를 때 입에 넣으면 갈증이 줄어들지.


할머니는 가방끈에 달린 조그만 지퍼를 열고 청포도 알사탕을 꺼내 쥐어주셨습니다. '아들이랑 왔는데 금세 올라가 버려서요.'라고 말하자, '훗. 중학생만 돼도 못 따라가요. 힘이 넘칠 때거든.' 그 말씀을 마치곤 쿨하게 등을 돌리시곤 바람처럼 사라지셨습니다.


'이 분은 설악산의 치유자가 분명해!'


저는 그분을 '설악산 힐러'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설악산 힐러님 도움 덕분에 울산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우연히 찍은 설악 힐러님의 모습


오랜 시간 기다리던 아들이 반갑게 뛰어내려와 저를 데리고 올랐습니다. '아빠 빨리 와봐!' 그렇게 마주한 장관!


'아름답습니다! 설악 울산바위!'


산에 오르는 동안 사진을 이것저것 찍기도 했지만 오히려 울산바위에선 셔터를 별로 누르지 않았습니다.


파노라마 사진
우리 눈에 담아 가자!


그렇게 3차 사나이의 대모험은 끝이 났습니다.


내려오자마자 허겁지겁 해물파전을 먹고 땀과 피로감이 가득 쌓인 채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멈춰서는 시간 때문에 사지 못한 엄마를 위한 가평 잣 호두과자를 샀습니다. 무사히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려는 데 아들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빠! 사나이의 모험, 수고하셨어요!
재밌었어요!


둘은 서태웅과 강백호의 박수처럼 경쾌하게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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