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 말을 좋아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제삼자의 거리에서 바라봤다.
비행기나 마트에서 떼쓰며 우는 아이를 보면 '시끄럽지만 아이니까 뭐.' 이 정도의 반응으로 그치지만,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방치하거나 아이를 위해 뭔가를 요구하는 부모에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애들 교육 좀 잘 시키지. 쩝."
부모가 되고 나니 뭔가가 달라졌다. 아이도 부모도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 아이는 울고 떼쓰는 게 당연한 일이다.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 하지만 새삼 '세상엔 가르칠 게 너무 많구나.' 싶다. 잔소리가 는다. 아이는 아이답게 잔소리를 이해하지 못하니 끝없이 가르침을 반복한다. 그러다 문득, 또는 가끔씩, 수많은 규율에 둘러싸인 아이가 안쓰러워진다.
그렇게 육아에 지친 부모는 세상이 나를 향해 더 친절해주길 내심 바란다. 그 바람은 적극적이거나 당연한 바람이라기 보단 '그랬으면 좋겠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바람이다. 나의 피곤함을, 나의 괴로움을 온 우주가 용납해 주었으면, 친절하게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무의식적 희망에 가깝다.
이런 희망에는 논리가 없다. 가끔 마주치게 되는 갑질 부모들은 무의식적 희망을 당연한 것과 혼동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성찰이 부족한 건 비난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 의식의 근저는 이해가 간다. 그들은 몹시 지쳤고 힘들다는 것.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단 것.
실제 대부분의 부모는 공공장소에서 울고 떼쓰는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간다.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본다. 그 뒷모습이 안쓰럽다. 뉴스나 TV에 나오는 진상 부모는 적다. 적기 때문에 뉴스나 TV에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은 사례를 토대로 편견을 당연시하곤 한다.
모두가 바쁘고 힘든 세상. 남에게 조금의 민폐도 끼치면 안 되고 동정을 바라서도 안되며 조금의 손해도 보면 바보가 된다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은 웅크리고 있다. 잔뜩 화를 품은 채 웅크리고 있거나 폐가 될까 무서워 웅크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수많은 이들의 작은 친절과 호의 속에 자라왔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그 마을주민은 대단한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량과 용서라는 작은 친절과 공감으로 아이와 부모를 대하는 사람들이다. 팽팽한 긴장 대신 약간은 느슨하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여유 있게, 부모와 아이를 대하는 주민들이다.
그 마을에도 반성 없는 진상, 갑질 부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의 느슨하고 덜 차가운 분위기로 보호받고 혜택을 입으며 건강하게 크는 건 대부분의 선량한 아이들과 부모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다시 작은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살기 좋은 마을은 다시, 그렇게 자란 용서와 친절을 아는 아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도덕성은 금지시키고 숨 막히는 규율을 들이대며 완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은 아이의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해 주면서 그래도 세상에는 용서라는 자비심이 있다고 말해주어 아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치 있고 관심 어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 <공감의 시대> by 제러미 리프킨 中 마사 누스바움의 '사고의 격변 Upheavls of Thought'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