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롯트 캡리스 매트블랙과 다이소 3천 원 만년필
요즘이야 글은 노트북이나 PC로 쓰기 마련이지만 가끔 손글씨가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일기 같은 것은 노트북으로 써봐야 나중에 클릭도 않게 되지만 종이 노트는 아무래도 다른 맛이 있다. 서가에 꺼내놓고 가끔 펼쳐 읽으며 키득거리기 좋다. '뭐야, 대학시절 예쁘고 공부 잘한 여자 후배가 나를 좋아한 거 맞네!'라고 무릎을 탁 치며, 뒤늦은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딱 자신의 깨달음만큼을 살아내는 법이다. (물론 대학 졸업 후 니체의 위버멘쉬급 각성을 한 덕에 지금의 아내와 만났다라고 어쩐지 부연해두고 싶다...)
종이에 글을 쓰고 싶을 땐 만년필을 사는 편이다. 만년필이라는 게 단순한 필기도구인가 하면, 몇 안 되는 남자들의 장신구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 봐야 한다. 즉 손목시계와 만년필은 넥타이와 넥타이핀처럼 한 세트다. 이 주장은 아래 조니뎁의 몽블랑 광고 이미지를 보면 확인 가능하다. 글을 쓰며 영감을 떠올리려는 조니뎁의 표정과 시계, 만년필이란 오브제가 어우러져 지적인 젠틀맨의 공기가 감도는 미장센을 완성한다.
그런데 마음의 바람이 불 때마다 몽블랑의 시계와 스타워커라인 만년필을 사제 꼈다간, 나는 노트가 아니라 카드 고지서를 앞에 놓고 머리를 감싸 쥔 조니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책상 서랍엔 쓰다가 고장 나 버린, 볼펜 가격 정도의 만년필이 그득하다.
인도 출장에서 사 온 700원짜리 만년필부터 독일에서 산 2유로짜리 만년필, 집 앞 문구점에서 산 일회용 만년필까지... 나름 다시 써보려 이리저리 궁리해 봐도 펜닙(만년필 펜촉) 한쪽 이빨이 나갔거나 토하듯 잉크를 뱉어내는 통에 그저 추억으로 보관 중이다. 물론 개중에는 부품 호환이 되는 경우가 있어 컨버터(만년필 잉크주입통)를 다른 만년필에 끼우고 뚜껑을 엉뚱한 녀석에 끼워서 쓰기도 한다. 일종의 만년필계의 프랑켄슈타인인 셈이다.
최근 캡리스 만년필이란 걸 알게 됐다. 볼펜처럼 딸깍 누르면 펜닙이 튀어나와 글을 쓸 수 있고, 딸깍 누르면 펜 안으로 들어가 잉크 마름을 방지해 준다. '요즘 별 게 다 나오네... 만년필은 우산처럼 몇 천년 간 발전이 없을 줄 알았더니'라면서 신기해했다. 문제는 캡리스 만년필이 20만 원가량하는 고가였다는 것이랄까. 그런데 쇼핑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을 수도) 있다.
"명품이 있다면 보급형도 있다!"
나는 2만 원짜리 중국제 캡리스를 사서 애지중지 들고 다녔다. 얼마 전 글을 쓰다 보니 손이 점점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했다. '잠깐, 눈이 침침한가?' 싶던 찰나, 중국제 캡리스가 옆구리에서 잉크를 흘리며 말을 걸어왔다. '펑여우(친구여),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네... 내 다시 태어난다면 몽블라... 랑으로...' 순간 중국제 캡리스는 울컥 검은 잉크를 내 손바닥에 토하고 이별을 고했다. 난 조용히 화장실에서 씻기지 않는 잉크를 닦아내며 읊조렸다.
"짜이지엔!"
손에 묻은 잉크가 지워질 즈음 캡리스의 매력을 알게 된 나는, 처음으로 필기구에 돈을 쏟아부으며 캡리스의 원조 파이롯트사의 캡리스 매트블랙 만년필을 쇼핑했다. 펜을 받고 여기저기 찾아보니 내 예상과 다르게 캡리스 만년필의 역사는 길고 깊었다. 1963년에 볼펜 노크방식의 펜을 발명했고, 현재에는 무려 10세대 이상의 혁신을 거쳐왔다고 하니 펜을 대하는 손이 제법 진중해진다.
레이저로 각인된 내 이름과 매트블랙 특유의 무광느낌도 좋았다. 무엇보다 종이 위를 토스트 포장마차의 프라이팬에 올린 마아가린처럼 미끄러져가는 필기감이 기가 막혔다. 일기를 써도 '노벨상 위원회 전화를 받고 나니 벌써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개인 수영장에 드리운 오후의 볕은 어느새 마트 쇼핑용 포르셰와 등산용 G바겐 사이에 걸쳐 있다.'같은 거짓말이 술술 나올 듯했다.
그렇게 어제 받은 캡리스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다가 오늘 아내와 다이소에 갔다. 이런! 내 눈에 영롱한 플라스틱의 번쩍임이 스쳐갔다. 전설의 아이템으로 불리는 다이소 3천 원짜리 만년필 세트가 있었고 날름 사 오고 말았다. 이미 만년필이 있는데 쇼핑 충동을 억누르기란 이렇게 힘들다.
구성은 만년필과 펜촉 2개, 카트리지 3개, 컨버터까지 들어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필기감이었다. 무협에 나오는 화산파의 제자가 기를 실어 유려하게 검을 휘두르듯 바람을 가르며 펜은 종이 위를 건넜다. 하마터면 '나쥐우쓰 도보비?!(이것은 날아다니는 경공술?!)'이라고 외칠 뻔했다.
한동안 캡리스와 다이소를 잘 섞어 써봐야겠다. 과연 어느 쪽에서 명문이 탄생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잉크를 토하고 작별을 고한 중국제 캡리스가 빛나는 문장 뒤에서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