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음식이 먹고 싶을 땐 요리를 하자

케첩 소스 탕수육

by 뮤즈노트

90년대 서울 말투가 지금 들어보면 생경해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시대를 거친 나는 억양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이란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식빵 모서리 같은 법이어서 언뜻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땐 저랬었나?'라고 새삼스러울 뿐이다.


개중엔 물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음식들이 그렇다.


지금은 갈비 양념을 설탕과 물엿 위주로 달디달게 만들어 사용한다. 예전에는 진한 전통 간장과 슴슴한 감칠맛 위주였다. 설탕의 시대와 간장의 시대라고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그 변화는 워낙 서서히 일어나서 전통방식으로 며칠간 고기를 간장 양념에 재워 내놓는 식당의 고기를 맛보고 나서야 '옛날 맛이다!'라고 느끼게 된다. 을지로 <조선옥>이 그랬다.



또 하나 대표적인 메뉴가 짜장면이다. 놀랍게도 옛날 짜장면 맛을 구현하는 집은, 우연히 들른 친구 집 근처의 짜장면 집 한 군데를 빼곤 서울에서 가 본 적이 없다. (그마저도 이십 년 전에 맛 본터라 상호조차 떠오르지 않아 아쉽다) '짜장면 맛이 달라졌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이니까 맛있게 느껴졌던 거지'라고 말한다. 억울해해 봤자 딱히 바뀌는 건 없지만, 요즘 아이들이 고소한 기름맛과 고기 큐브가 큼지막하게 씹히고, 방금 수타로 뽑아낸 굵기가 서로 다른 면이 간간이 섞인 짜장면의 맛을 모르는 건 아쉽다.


주말에 아빠가 '짜장면 먹으러 가자'라고 말씀하시면 신나게 운동화를 접어 신고 따라나섰다. 플라스틱 발이 치렁하게 가려진 문을 촤르르 열고 들어가면 검은색, 흰색 조각돌이 박힌 반짝이는 테라조 바닥이 나를 맞이했다. 짜장면을 시키고 나서 갈색의 두꺼운 사기재질의 팔각찻잔에 담긴 보리차를 마신다. 주방장 아저씨가 쾅쾅 소리를 내며 면을 뽑고 20분 정도 기다리면 김이 나는 짜장면이 나왔다. 면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으면 기름지고 고소한 맛이 한가득 행복처럼 밀려들곤 했다.


내가 맛에 대해 남들보다 기억이 많은 건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인 듯도 싶다. 당시 외식이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특별한 이벤트였고 대개가 집밥 위주였기에 오전엔 TV에서 늘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빠듯한 살림이었기에 밥상엔 아욱국에 반찬 몇 가지가 전부였지만 가끔 어머니는 요리 노트에 적어둔 레시피로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니 일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점심 밥상에 떡갈비처럼 생긴 고기가 나와서 냉큼 젓가락질을 했다. 고기맛, 양파, 후추 맛이 짭짤하고 진하게 어우러져 입안을 휘감기 시작했고, '세상에 이런 천상의 맛이 있나?' 싶어 젓가락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흙마당을 뱅글뱅글 돌면서 소리쳤다. "엄마! 진짜 맛있어! 정말! 맛있어요!" 물론 두어 바퀴 돌고 다시 밥상에 왔을 때 철썩 엉덩이를 맞았던 생각이 난다.


어쨌거나 그 음식은 아빠 회사 근처 경양식 집에 가면 걸려 있던 함박스택이란 미지의 메뉴임을 알게 됐다. 이름만으로는 맛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비후까스(비프카츠, 소고기카츠, 규카츠)처럼 함박스택(햄버그 스테이크)은 정말 맛있었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 덕에 넉넉지 않은 단칸방 살림에도 맛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었다.


오늘은 문득 옛날 탕수육이 먹고 싶어졌다. 요즘은 바삭하기보단 쫄깃한 찹쌀 탕수육에 거무튀튀하고 달기만 한 소스가 표준이 됐다. A세트에 꼭 포함되는 사이드 메뉴처럼 변질되었다. 그러나 옛날 탕수육은 지금으로 치면 '투플러스 한우'를 먹는 것처럼 고오오급 요리에 속했다. 그래서 청요리를 먹는 날은 졸업식처럼 매우 특별한 날로 한정이 됐다.


어쨌거나 옛날 탕수육의 특징은 튀김옷의 바삭함과 붉은 케첩소스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흰 접시에 탕수육이 나오고 그 위에 묽은 케첩소스가 형형색색의 야채와 함께 부어져 나왔다. 사이드에는 양배추에 케첩을 뿌린 샐러드가 꼭 함께 곁들여 있어서 나중엔 소스와 적당히 섞이며 새콤한 맛을 전해줬다.


이처럼 예전엔 모두 부먹(진짜 청요리집에선 볶먹)인 셈이다. 아마 시간이 흘러도 유지되는 바삭한 튀김옷과 살포시 이불을 덮듯 어우러지는 케첩소스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찍먹파는 부먹파를 혐오한다. 그들은 어쩌면 달기만 한 설탕소스와 금세 눅눅해지는 탕수육 시대가 낳은 슬픈 맛의 전사들 일지 모른다. 그들이 옛날 탕수육을 맛본다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런 탕수육이 먹고 싶었어요!'라고 무릎을 꿇을 지도... 그럼 주방장 아저씨는 그들을 꼭 안으며 말하겠지. '앞으론 원리주의 부먹파를 용서해 주거라'... 훈훈한 장면이다.

(참, 이 삼 년 전 들른 강화도 대룡시장 근처 조짜장네 탕수육은 옛날 케첩 스타일이 남아있었습니다)


강화도 조짜장네 탕수육이 맛있었다


감자전분을 물에 풀어 놓아두면 전분과 물이 분리되면서 앙금처럼 가라앉는다. 물을 따라 버리고 딱딱해진 전분을 고기반죽으로 쓰게 되면 수분이 최소화되어 반죽이 얇게 잘 붙고 기름에서 물이 튀지 않으며 고온에서 갈라지며 바삭한 식감을 갖게 된다. 고기는 안심으로 사서 물에 생강즙과 함께 잠깐 담가 잡내를 없앴다.


기름을 되도록 적게 쓰려고 작은 스테인리스 팟을 사용해 조금씩 튀겨냈다. 반죽을 약간 넣어 지글거리며 위로 떠오르면 약 180도 정도니까 이때 고기를 튀겨내면 된다. 튀겨낸 고기는 키친타월 위에서 식혀주며 기름기를 빼주고 두 번 튀겨야 맛있다.



케첩소스는 목이버섯, 피망, 양파 정도만 사용했고 알룰로오스 설탕, 하인즈 케첩(산미가 오뚜기보다 강하고 감칠맛이 좋음), 오뚜기 식초, 전분물을 사용해서 되직하게 만들었다. 튀긴 고기에 소스를 부으면 맛있는 옛날 탕수육이 완성된다.


친구들과 두 끼(떡볶이)에서 밥을 먹어서, 저녁은 나중에 먹겠다는 아들도 탕수육 냄새를 맡고 슬쩍 와서는 '지금 같이 먹을게요'라면서 자리에 앉는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아내는 '정말 맛있다'라면서 연신 감탄하며 먹는다. '이 탕수육을 컵에 담아서 학교 앞에서 팔면 잘 팔리겠어'라는 아내와 '아빠 음식은 정말 맛있어요'라는 아들의 찬사에 어깨가 으쓱한다.



바삭 슴슴한 케첩소스 탕수육을 먹다 보니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옛날 탕수육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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