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야구장이란 공간을 추억함

동대문 야구장

by 뮤즈노트

기억의 궁전이란 기억술이 있다. 아주 익숙한 장소 하나하나에 외워야 할 물건을 놓는, 일종의 공간과 기억을 활용한 기억법이다. 그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어쩌면 기억은 늘 공간과 함께 있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억지스럽게 말하자면 공간이 기억을 만들고 추억을 만들고 모든 데이터를 생성하는 엔진인 것이다.


내게도 여러 공간이 있지만, 동대문야구장만큼은 아니다.


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집을 나선다. 백팩에는 늘 그렇듯 소설책이 한두권 들어있다. 동대문구장 앞 포장마차에 들러 순대야채곱창을 1인분 포장한다. 그리고 노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산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다. 가요나 올드팝을 들으며 주로 외야에 자리를 잡는다. 한산하다. 동대문야구장은 아마추어 경기밖에 열리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멀찌감치 두타빌딩이 보이고, 대회 휘장기가 날린다. 야간경기를 위한 라이트는 낯설정도로 거대하다. 나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방금 사온 곱창을 조심스레 꺼내 옆 좌석에 풀어놓는다. 방금 볶아 여전히 뜨끈하다. 아직 마시기에는 서늘한 날씨인데 과감히 맥주캔을 딴다. 그때쯤 경기가 시작된다. 딩동댕 벨이 울리고 80년대에서 건너온 듯한 서른살 정도 된 아가씨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1번타자 세컨 베이스맨 OOO.


그때서야 맥주를 한모금 넘기고 기름과 고추양념이 범벅된 순대야채곱창을 한젓가락 집어 입에 넣는다. 차가워진 입안에 순식간에 온기가 감돈다. 그렇게 2회까지는 맥주를 마시고 곱창으로 안주겸 허기를 달랜다. 다 마실 때쯤 백팩을 허리쪽에 받쳐놓고 책을 펼친다. 살짝 취기로 흥겨워진 상태다.


외야엔 등받이 없는 의자 뿐이다. 그마저도 플라스틱이 풍화되어 얼룩덜룩하다. 사람도 없다. 학부모나 응원단은 모두 그물망이 쳐진 로얄석에 앉아 있다. 하얀 유니폼을 다려입은 어린 선수들이 초록색 인조잔디 위에서 무언가에 집중하며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 흐뭇한 광경이다. 엉뚱하게도 그 무렵 시애틀 매리너스의 유광점퍼를 동대문야구장내 유니폼 샵에서 맞춰입고 있었다. 외야 선수들은 혹시 내가 스카우터가 아닐까 자꾸 신경쓰는 듯도 했다. 스카우터였다면 다 뽑아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동대문야구장의 봄날 춘계리그의 광경은 그 정도다.


낡은 구장을 보수하려는 페인트칠이 3루 내야에서 시작되어 좌익수 근처까지 왔을 때, 아마도 7회정도 되었던 듯 싶다. 비둘기가 깃발위를 날아가고 하늘이 유독 파랗다고 생각했을 때, 하얀 공 하나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공은 몇번 튀기더니 내 근처에 떨어졌다. 아주 유려한 포물선이었다. 공을 집어들었다.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며 살짝 까진 가죽외에는 깨끗했다. 얼마전까지 어린 투수 손에 들려있던 야구공이 지금은 내 손에 들려있다. 공간적으론 멀리 떨어진 내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인생은 운이라던가 인연이라던가... 알 수는 없지만 홈런공의 즉물적인 느낌은 어쩐지 살아있다는 사실에 막연한 긍정을 갖게하는 힘이 있다.


동대문야구장은 그런 공간이었다. 아주 멀리있었도 동대문야구장은 늘 나와 이어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매주 찾아왔지만 가까운 이들을 데리고 온 기억은 거의 없다. 하긴 황금같은 휴일에 실업야구나 대학야구, 고교야구를 보러 이곳을 찾는 이는 없었을테니까. 덕분에 동대문야구장은 오롯이 나와만 이어져있다는 특별한 자긍심을 주곤했다. 그때 마시던 맥주, 순대곱창의 얼큰하고 기름진 맛, 잘 맞은 타구가 내는 타격음,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앉는 야구공. 나의... 적당히라고 하기엔 조금 더 외로웠던 서울에서의 대학생활.


동대문야구장은 그 때의 정서를 남겼고, 나는 그 공간이 만들어낸 기억을 지금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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