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머리를 깎이겠다고 이발소에 데려갔던 남편이 씩씩대며 돌아왔다. 다시는 그 이발소에 안 가겠노라며 앞으로는 비싸도 내가 가는 미용실로 가자고 한다.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그나마 제일 싼 터키인 이민자가 하는 이발소를 찾아낸 남편이 애를 거기 데려갔다가 꽤나 불친절한 대접을 받았나 보다. 무슨 일인가 들어 보니 여름에 한국 갔을 때 했던 머리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런 식으로 깎아 달라고 말을 했더니 이발소 주인이 그때부터 엄청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유럽에서 산지가 몇 년인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당신이 잘못했네. 감히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주문을 했단 말이야? 그냥 입 꾹 다물고 깎아 주시는 대로 있었어야지."
프랑스 5년, 스위스 5년 차 도합 10년의 유럽 생활 동안 느낀 것 중의 하나는 한국 수준의 친절을 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에게 기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다. 미국만 해도 자본주의의 끝판왕 국가답게 팁을 바라서일 수도 있지만 꽤 친절한데 유럽에서는 돈 주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 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쇼핑을 하러 매장에 들어가면 매장 직원이 어서 오라고 인사를 하면서 뭐 필요한 게 있냐고 물어보지만 파리에서는 손님이 매장에 들어가도 본척만척하는 직원들이 많아서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니 프랑스인 마케팅 교수가 하는 말이 원래 프랑스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손님이 직원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거라고, 그러면 직원이 인사를 받아 주면서 대화가 시작되는 게 전통적인 손님맞이 순서란 거다. 마치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대문 앞에서 손님이 '이리 오너라, 흠흠'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내면 그때 문이 열리듯 남의 공간에 들어가는 손님이 먼저 '봉주르'를 해야 된다는 발상이랄까. 물론 요즘은 관광객이 많아져서 직원이 먼저 인사를 하는 곳이 많아졌지만 말이다.
손님이 돈을 내지만 절대 왕은 아닌 유럽에서 손님이 뭔가 까다로운 요구를 할 것 같으면 이곳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되레 불친절해지는 경향이 있다. 남편이 아역 모델이나 배우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아이 당사자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전처럼 깎아 달라고 했을 뿐인데도 '원하는 스타일이 있는 손님 = 까다로운 손님, 만약 이 스타일대로 결과물이 안 나오면 항의를 할 것 같은 손님'으로 짐작하고 그때부터 불평을 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실력이 부족해서 원하는 대로 못 깎아 줄 것 같지만 '애가 가만히 있지 않고 자꾸 몸을 움직여서 자르기가 힘들다, 동양인 머릿결이라 힘들다 (그러는 자기도 터키인이고 거기 오는 사람들이 다 두꺼운 직모를 가진 터키인 남자들이었는데!), 아시안 스타일이라 못한다' 등등 댈 수 있는 모든 핑계를 대면서 불평을 해서 돈 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한국 남자애들의 5세 이전 공통 머리스타일인 바가지 머리가 그렇게 하기 어려운 건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 미장원에 가면 구체적으로 원하는 스타일이 있는 손님을 더 환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아서 잘해 주세요', 하고 나중에 맘에 안 들어하는 손님보다는 원하는 스타일을 꼭 집어서 말해 주는 사람이 미용사 입장에서도 더 편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좀 어려운 도전일수록 미용사들이 더 뿌듯해한다. 내가 신부화장을 받았을 때는 짝짝이 쌍꺼풀인 내 눈을 균형 맞춰 화장해 놓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정말 뿌듯해했다. 자기가 너무 잘한 거 같다고... 유럽이었으면 '눈이 짝짝이라서 화장을 할 수가 없네' 하고 화장해 주는 사람이 불평을 해서 앉아 있는 내가 좌불안석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홍콩에서 염색을 잘못해서 정말 이상한 색깔의 개털이 되어 버린 머리로 찾아간 한국 미용실에서는 최대한 머릿결을 살리면서 다시 자연스러운 검은 머리로 돌려놓느라 고생한 헤어디자이너가 힘든 조건이었는데 색깔이 잘 나왔다며 나보다 더 좋아했다. 어려운 도전일수록 자신의 실력이 늘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서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는 게 한국인의 근성이라면 유럽 사람들은 같은 돈 받으면 최대한 쉬운 상대만 찾는 느낌, 딱 최소한만 일하려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돈 받는 만큼만 일한다'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열정 페이'처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게 불가능하긴 하겠지만 때로는 내가 왜 돈 내면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든 매장이 다 욕쟁이 할머니 집인가’ 싶은 회의감이 들 정도로 서비스 정신이란 게 부족한 게 유럽의 식당, 서비스직인 것 같다.
불친절한 이발소를 갔다 와서 불쾌해진 남편이 씩씩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니 며칠 전 답답해서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들고 무작정 거리를 걸었던 날 들어갔던 카페가 떠올랐다. 마냥 걷고 싶었지만 길이 공사 중이라 막혀 있어서 트램을 타고 시내를 갔다. 시내 서점에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읽고 싶은 책을 한두권 질러 버리고도 싶었지만 그건 싱글일 때나 하던 스트레스 해소책이고 스위스의 물가와 아줌마라는 신분이 내 발목을 잡았다. 검색을 통해 아이용 글씨 연습 공책이 인터넷 가격보다 그다지 비싸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겨우 하나 사고 서점에 딸린 카페에 앉아 서버가 오길 기다렸다.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머리가 희끗하고 키가 매우 큰 점잖은 서버는 혼자서 다른 테이블 손님들을 위한 와플을 만들랴, 커피를 뽑으랴 바빴다. 평소 같으면 주문받으러 오는데 세월아 네월아 오래 걸리는 스위스의 카페가 답답하겠지만 이 날은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아 창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마음속 열기를 식히면서 그저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기다리고 있노라니 서버가 와서 신사적인 말투로 물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뭘 주문하겠냐고. 그 부드러운 말투에 쌉싸름하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던 마음을 바꿔 카푸치노를 시켰다. 관심도 없으면서 안부를 묻는 별다른 스몰토크도 없었고 과한 친절도 없었지만 부드러운 거품이 가득한 카푸치노 한 잔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그의 정갈한 서빙 솜씨에 꽤 존중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바쁘면 메뉴판을 휙 던지듯 놓고 가는 서버도 많이 봐서 그런지 카푸치노 거품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커피잔을 내려놓는 손짓 하나에 잠깐 기분이 나아졌다. 만약 최악의 하루에 평소처럼 불친절한 서버를 만났다면 아무것도 아닌 그 불친절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울음보를 찔러서 그 자리에서 눈물이 흘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짐해 봤다. 나도 내 일을 제대로 하자. 내가 내 일을 제대로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최악의 하루에 한 줌의 위로가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