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15. 2022

해야 되는 건 그냥 하기

소아과에서

 언제부턴가 아이 얼굴에 두드러기가 났다가 놔두면 조금 후에 가라앉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빈도가 처음에는 환절기에만 그랬다가, 한 달에 한 번 그러다가, 최근에는 매주 그럴 정도로 잦아져서 걱정이 되었지만 이유를 모른 채 방치하고 있었다. 사실은 알레르기 검사 날짜를 잡으려고 집 근처에 있는 소아과에 전화를 했는데 그 소아과는 평소에 전화를 절대 받지 않는 걸로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아서 전화를 해도 받질 않으니 검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힘들게 약속을 잡고 할머니 의사에게 알레르기 검사 좀 해 달라고 하니까 할 필요 없다는 거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는 알레르기가 왔다가 사라지기도 하는데 뭐하러 쓸데없는 검사를 하냐고. 내 돈 내고 내가 검사하겠다고 하는데도 또 거절당했다. 스위스 의사에게. 스위스는 불필요한 검사와 약물 남용을 지양하고 느리지만 자연적인 치유를 강조하는 문화라 아플 때 상당히 답답하다. 감기몸살로 죽을 거 같아 병원을 가면 따뜻한 차를 마시라고 해서 한 달 내내 감기가 안 떨어지고, 눈 다래끼가 나서 찾아가면 뜨거운 물수건으로 찜질을 해 주라 고만할 뿐 항생제 연고를 주지 않아 결국 몇 달 동안 다래끼가 더 커졌다가 터져 버려서 째는 수술을 하다 보면 유럽식 자연 치유가 싫어진다.


 결국 얼마 전엔 두드러기가 심해져서 아이가 응급실을 갔다. 유치원에서  뮤슬리와 과일 간식을 먹고 나서 얼굴이 부풀어 오르더니 두드러기가 나고 눈까지 빨개지고 가렵다고 애가 긁어대니 선생님이 급하게 연락 와서 애를 데려가란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애는 잘 참고 있었는데 엉망진창인 얼굴을 보니 엄마인 내 마음이 안 좋다. 응급실에서 하염없이 몇 시간을 대기하니 의사를 만났을 땐 어느새 두드러기가 가라앉아서 허무하긴 했지만 응급실 의사가 처방전을 써 줘서 응급상황에서 먹을 수 있는 두드러기 약을 드디어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도저히 검사를 미룰 수 없겠다 싶어서 전화를 잘 받는 집에서 먼 곳의 소아과로 옮겨서 알레르기 검사 날짜를 잡았다. 다행히 새 소아과 의사는 응급실까지 갔다 왔다고 하니 군말 없이 검사를 해 준다. “그런데 검사해도 뭐가 안 나올 걸? 이 나이에는 왜 그러는지 잘 안 나와.”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피검사를 해야 되는데 예상했던 대로 이 녀석 난리가 났다. 사실 주치의는 추천 편지만 써 주고 정밀 검사는 큰 병원이나 검사 센터에 가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이한테 오늘은 그냥 의사 선생님 보기만 하는 거지 아픈 거 아니라고 설명을 했었는데 의외로 의사가 자기네 소아과에서도 알레르기 검사 가능하다고 해서 내친김에 당일에 피를 뽑게 된 거다. 보기만 하는 거라더니 왜 아프게 하냐고,  약속 안 지켰다고 울고 소리 지르고... 창피해서 진땀 나고 얼굴 빨개지고 간호사 눈치도 보여서 도망가려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서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는 협상 카드를 꺼내며 설득했다. 이 검사를 마치면 친구랑 플레이 데이트도 하고 숨겨놓은 카봇도 다 꺼내 주고 아이스크림도 사 주겠다고 무려 세 가지나 되는 특전을 약속하자 겨우 설득이 되었다. 카봇과 아이스크림의 위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손가락 두 개나 컷팅해서 피를 쥐어짜 내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피를 뽑는데도 의젓하게 잘 참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잘 참을 수 있으면서 그 난리를 쳤단 말이냐 너는. 간호사가 피를 다 뽑고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여 주더니 기특하다고 아이에게 선물을 골라보라며 책상 서랍을 탁 여는데 그 서랍 안에는 미니카, 구슬, 사탕, 레고, 퍼즐이 가득...... 아니 뭐야!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보여 줬어야지! 


애초에 애들 눈에 잘 보이게 꺼내 놓지 않은 이유는 뭐지?

애가 울고불고하는데 왜 서랍을 열어서 안 보여 줬을까?

'잘 참으면 나중에 선물 줄게', 하고 말이라도 해 주지......


 정말 살 수록 의문 부호 투성이인 스위스다. 그래도 이 상황의 기저에 깔린 사고방식이 이해는 간다. 부모의 창피함을 덜기 위해, 간호사의 시간을 아껴 주기 위해, 이번 한 번의 역경만 모면하기 위해 아이가 응당 해야 할 일을 뇌물 바쳐 가며 해 달라고 구걸하지 않겠다는 뚝심 같은 거겠지. 


 사실 나의 기본 성향은 원칙주의, 이상주의적이어서 이런 사고방식과 궤를 같이 하는데 실전 육아는 임기응변과 타협, 관용 없이는 매일 지치지 않고 해 나가기가 불가능하기에 그동안 너무 자주 타협해 왔던 경향이 있다. 식당에서 밥 그만 먹고 싶다, 돌아다니고 싶다, 징징대고 다른 테이블 기웃거리는 게 너무 민폐 같아서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스마트폰을 쥐어 줬었는데 어느 날 스위스 산장 호텔의 거대한 식당 수십 테이블의 어린이들 중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건 우리 애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 후로 밖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절대 핸드폰을 보여 주지 않고 끝없이 설득했더니 이제는 핸드폰 없이 꽤 오래 식당에서 참을성 있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시간이 걸리기에 '애가 다 그렇지'라고 이해해 주는 성숙한 주변 어른들의 협조가 필요하지만.



 겨울이 왔다. 거의 다 끝나가는 올 한 해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스멀스멀 생겨난다. 왜 또 이렇게 시간을 허비했을까? 시작만 하고 끝맺음하지 못한 일들과, 시작조차 못한 일들과, 대강 끝냈지만 스스로도 불만족스럽고 남에게도 부끄러운 수준으로 끝내버린 일들을 곱씹느라 이불 킥하면서 길어진 밤을 보낸다. 게다가 전쟁, 질병, 참사가 끊이지 않은 세계의 고통을 내재화시켜 가뜩이나 번뇌 많은 내면에 턱턱 얹고 나니 살아야 할 이유, 해야 할 이유, 일어나야 할 이유, 이겨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 이렇게 푹 퍼져 버려 아무것도 하기 힘들 때 스위스 소아과에서 본 풍경을 떠올리며 나 자신에게 말한다. 


 피를 뽑는 건 아프지만 너의 건강을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 꼭 무엇을 얻기 위해 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참는 거야. 스스로 다독이고 멘털 꽉 붙잡아서 얼마나 오래 걸리든 실컷 울고 소리 지르고 좌절하고 도망도 갔다가 꼭 돌아오렴. 얼마든지 기다려 줄게. 자, 이제 맞설 준비가 됐니? 의연하게 참고 나서 운 좋으면 미니카나 사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없어도 어쩔 수 없고. 해야 되는 건 그냥 하자.


  

작가의 이전글 나를 구원한 친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