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일주일에 한 개의 글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었는데 스위스로 이사 오고 나서는 여의치 않아서 한 달에 한 개의 글이라도 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벌써 한 서너 달이 지나 버렸다. 그나마 꾸준하게 글을 올렸던 시절은 홍콩에서 남의 도움을 받아 가사노동을 외주화 했을 때이고 스위스에 돌아와서는 끊임없지만 티가 나지 않는 이 작고 거대한 집안일들에 치여 도저히 쓸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쓰는 시간 정도는 낼 수 있다. 그러나 쓰기 위해 읽어야 하는 시간, 읽고 나서 마음에 새기는 시간, 일상을 반추할 시간, 멍 때릴 시간 없이 그저 쏟아 내기만 하면 그 글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쓸 수 없다. 결국 한 여성이 무언가 유의미한 생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여성 (가사 도우미, 친족 여성 등)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홀로 살아 내는 타향살이는 꿈만 꾸고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는 현상에 쉬운 핑곗거리를 준다.
최근 읽은 책에서는 이런 나의 핑계를 조금 더 명확하고 중립적인 언어로 서술한 문장을 마주쳤다.
“부분적으로는 피로 때문에, 분노가 억눌리고 자신의 존재와 접촉을 상실한 여성의 피로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타인이 끊임없이 없었던 일로 되돌려 놓는 소소한 집안일, 허드렛일, 어린아이들의 끝없는 요구를 보살피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여성의 단절적인 삶 때문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
-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중에서
불평불만도 이렇게 고급스럽게 쓸 수 있어야 작가 그릇일 텐데 역시 나는 그냥 종지 그릇이다. 1월부터 계속된 집안 식구들의 잔병 뒤치다꺼리, 아이의 방학과 주말 시간 때워 주기, 외주화 할 수 없는 식사 준비, 올림픽도 아닌데 사활을 걸고 준비하는 아이 생일파티, 그 이후 앓아누운 아이가 학교를 가지 못해 같이 앓게 된 나날들. 그리고 분명 생각해 둔 글감이 있었는데 노트를 뒤적거려 봐도 기억나지 않고 시답잖은 일상에 대한 감상들도 어느새 휘발되어 이렇게 쓰레기 같은 푸념만 남기고 사라졌다.
얼마 전 루체른 미술관을 갔을 때 이런 조각상을 보았다. ‘예술가로서의 자화상’이란 이름의 조각상이었다. 이 작가가 생각하기에 예술이란 무언가 쓸어 담는 행위인가 보다. 그가 쓸어 담는 것은 무엇일까?
재능과 열정과 감상을 모조리 다 남김없이 태우고 남은 재?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지만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마땅할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주워 담는 내 새끼 같은 그것?
분노와 열심이 불길에 타고 사라지고 나서야 남은 강인하고 단단하게 제련된 문장들 혹은 붓질들?
이 세상과 사회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버려 버리는 작고 소중한 것들?
아니면 오늘 지금 이 순간 횡으로 나아가는 나와 하필 마주쳐 버린 종의 모든 것들 - 거리의 나뭇잎,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누군가 떨어트리고 간 버스표, 눈물이 고인 웅덩이, 가만히 서 있는 뉘 집 개와 길고양이 - 그 집합체에 불과한 우연 혹은 운명?
어디 예술가뿐이랴. 빗자루를 든 청소부의 자세로 내가 살아온 자국들을 묵묵히 쓸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와 접촉을 상실한 모든 피로한 여성의 대표 (그런 대표 자격을 누가 정식으로 부여하진 않았지만)로서 말하고 싶다. 지금 당신, 그렇게 살아가고 있군요. 무척 피곤하겠지만 그게 예술이라네요. 딱히 다른 게 예술이 아니라... 그게 예술이 아니면 최소한 인생 정도는 되겠죠. 어차피 인생이 예술보다 더 큰 것 아닌가요? 아니 더 크지 않다 해도 그게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거잖아요. 그러니 살아 냅시다. 예술보다 먼저 인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