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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Jun 10. 2023

클래식을 듣다 잠든 이에게

피터와 늑대 콘서트를 다녀와서

   일본인 친구가 우리 집 근처 공연장에서 '피터와 늑대'라는 아이들을 위한 클래식 콘서트를 한다고 같이 가겠냐고 해서 처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클래식 공연을 갔다. 조성진, 정명훈, 손열음, 임윤찬 등 자랑스러운 한국 예술가들이 내가 사는 곳에 공연을 오면 열심히 쫓아다니기는 하지만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연주를 하고 있는지 100% 체감을 못하면서 공연장에 앉아 있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어렸을 때 클래식 악기를 배우긴 했지만 피아노는 학원에서 내주는 숙제의 늪에 빠져 의무감으로 쳤지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고, 할아버지 선생님에게 배운 바이올린은 '반짝반짝 작은 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재미있는 곡을 안 가르쳐 주기에 만화방으로 도망쳐 버리고 만 나의 과거...


   '그래, 우리 애는 나 같은 길을 걷지 말고 자연스럽고 즐거운 방식으로 클래식 음악에 입문시켜야겠다!'


   이런 다짐으로 '피터와 늑대'가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가겠다고 친구에게 말하고 공연 표를 샀다. 다섯 살짜리 아들내미 역시 콘서트가 뭔지는 모르지만 콘서트 끝나고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게 해 주겠다니 독어로 된 공연이지만 볼 수 있다고 우긴다.


그림 출처: Andrea Vogt, 'Peter und der Wolf'


   '피터와 늑대'는 알고 보니 나만 빼고 세상 사람 다 알고 있었던 엄청나게 유명한 어린이 대상 관현악곡이었다. 1936년 구 소련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어린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클래식 악기들을 소개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작곡한 곡이다. 작은 새가 지저귀고 집오리가 헤엄치는 평화로운 숲에 사는 피터는 할아버지가 늑대가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라고 경고하지만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그러다가 정말로 늑대가 집오리를 잡아먹으니 꾀를 써서 밧줄로 늑대를 붙잡고 마침 지나가던 사냥꾼들과 함께 늑대를 동물원에 데려다준다. 마을 사람들은 피터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곡은 끝난다. 이 곡에서는 각각의 악기가 등장인물과 동물을 맡아 표현한다. 피터는 현악 합주, 할아버지는 바순, 고양이는 클라리넷, 새는 플루트, 집오리는 오보에, 늑대는 호른, 사냥꾼들은 팀파니와 큰북 소리로 표현되었다.


   그래도 처음엔 제법 집중해서 보려고 노력하던 아들. 그런데 연주 중간 독어로 동화를 읽어 주는 시간이 길어지니 점점 고개가 꺾이더니 드디어 숙면을 취한다. 심지어 첼리스트가 제일 앞자리에서 대놓고 숙면하는 아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민망해서 계속 아들내미 옆구리를 꼬집었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계속 잔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콘서트가 끝나고 남들이 박수를 치는 소리에 퍼뜩 놀라서 깨더니 열심히 박수는 따라 친다. 같이 간 일본인 친구의 아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잘만 듣던데... '제일 멋진 악기는 팀파니였어요'라는 감상평까지 남기면서, 쩝.


   잘한 것도 없으면서 공연장을 탈출하지 않고 안에 앉아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일 했다는 듯이 당당하게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요구하는 아들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놀이터에서 친구랑 뛰어놀며 까르르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어 버렸다. 이렇게 뛰어놀기나 해야 되는 녀석을 데리고 내가 무슨 클래식 콘서트를 보여 주겠다고 한 건지...


   1930년대 어린이들은 교향곡을 진득하게 들으며 '이건 바이올린이구나, 이런 소리가 오보에구나, 호른 소리가 낮고 음침하게 깔리는 게 늑대가 오는가 보구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오늘날 유튜브 시대에 (잠들지 않은 엄친아 8살짜리를 제외하고) 우리 아이들은 시각적 이미지 없이는 앞에서 벌어지는 행위에 관심을 이어나가기 힘든 걸까? 2023년에는 새로운 방식의 클래식 입문곡이 필요한가?


  아니면 독어로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이 너무 재미없게 읽었나? 좀 더 극적인 연기력이 필요했었나? 1985년에 서울시향 연주에 맞춰 피터와 늑대의 모든 캐릭터를 열연하는 연기의 신 최불암 선생처럼...


https://youtu.be/JB8Wwg0enwg

1985년 최불암 내레이션  '피터와 늑대' 서울시향 연주. 초강추 영상!


   어쨌든 우리 아들은 클래식 음악에 흥미가 없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그다음 날 아침 내가 청소기를 밀고 있을 때 도와준다며 설치던 녀석이 갑자기 나를 부른다.


 "엄마, 나 좀 보세요! 나 뭐 하는 거게요?"


  걸레 밀대를 들고 나타나서 걸레도 없이 거실 바닥을 밀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녀석이 긴 걸레 밀대를 옆으로 뉘어 들고 입으로 부는 시늉을 하고 있다.


 "설마 플루트 부는 거야?"

 "헤헤헤, 맞았어!"

걸레밀대 플루트

  어제 콘서트에서 아무것도 배우거나 느끼지 못한 줄 알았더니 자면서도 뭐 보긴 본 모양이네. 이런 기특한 녀석!


   모든 아이는 다르게 자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다른 속도와 다른 방향으로. 그걸 알면서도 나는 참고 기다리지 못한다. 정답을 정해 놓고 그 모양 그 꼴로 자라나지 않으면 다그치고 실망한다. 클래식 콘서트를 처음 봤으면 잠들 수도 있는 건데 '너 표값 아깝게 잤다고 아빠한테 이를 거야!' 이런 소리나 하질 않나, 남의 아들이랑 비교하면서 내심 속으로 실망하지 않나. 나 같은 부모가 기대하는 것은 자녀의 성장이 아니라 우리가 쏟아부은 특효약들 (비싼 과외, 각종 체험 학습, 공연, 영어 유치원...)의 효과였다. 천천히 자라는 아이를 참지 못해 끊임없이 '1.5배속 재생'과 '10초 뒤로 이동' 버튼을 눌러 대고 있었던 속도중독자는 오히려 나였다.


   독어를 못 알아 들어서 나랑 같은 부분에서 졸렸고 다만 나는 어른이라 참았고, 너는 아이라 콘서트 중 잠들어 버렸던 아들아. 내가 쏟아부은 것들에 의해 왜곡되고 얼룩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와 얼굴, 몸짓으로 자라나는 너의 이 짧은 어린 시절을 빨리 감기 해 버리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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