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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Jul 25. 2023

글은 글을 부른다.

오지은 '마음이 하는 일'을 읽고

      내가 사는 동네의 도서관에 꽤 많은 수량의 한국책들이 갑자기 생겨났다. 한국 대사관에서 한꺼번에 100권가량의 도서들을 기증했기 때문이다. 가끔 고국을 방문할 때 모국어로 된 좋은 책들을 이고 지고 오고 싶지만 수하물 무게 제한으로 인해 몇 권 못 가져오고 e-book으로만 한국어 책들을 읽을 때의 아쉬움을 품고 사는 사람으로서 동네 도서관에 한국 신간들이 생겼을 때의 감격이란! 한류 열풍을 타고 해외에서 한국의 음악, 영화, 방송, 패션, 음식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관심이 생겨나고 있는데 책 기증은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사업 중에서 적은 비용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적절한 외교적 노력이지 않을까 싶다. 그중에 몇 개의 그림책들의 한국어 정보를 독어로 번역해서 분류하는 작업을 자원봉사로 도왔던 터라 도서관의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된 그 책들을 보니 벅차오른다. 내가 쓴 것도, 내가 기증한 것도 아니지만...... 잘 생긴 남의 자식 보고 감탄하다가 흘러내린 양말 한 짝 정도 다시 신겨 주고 뿌듯한 옆집 아줌마처럼 동화책들을 쓰다듬어 본다.


     아이에게 읽힐 그림책을 욕심껏 10권이나 빌리고 또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 어슬렁거리다가 이 책을 만났다. 평범한 것 같으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을 가진 책, '마음이 하는 일.'


     그리스 아테네 신전보다 여신이 많이 산다는 홍대에서 '홍대 여신' 중 한 명으로 불렸던, 본인은 달갑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굳이 명명하자면 인디 뮤지션이라고 일컬어지는 오지은이 영화 잡지 씨네 21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낸 산문집이었다. 이전에 브런치에 서평이라곤 할 수 없지만 깊은 인상을 받고 짧은 감상 (https://brunch.co.kr/@snowflakesea/102)을 썼던 '고독한 직업' 역시 일본의 여성 영화감독 니시카와 미와가 쓴 산문집이었는데 무의식 중에 아마 나는 다른 창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인데 글까지 잘 쓰는 사람들의 산문 읽기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전업으로 글쓰기에만 매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는 문장이 유려하며 내용이 재미있고 묵직한 메시지까지 있다 해도 그게 업이니까 응당 그래야 하는 거 아니겠냐며 박한 평가를 내리지만 음악가나 영화감독이 쓴 글에는 그들의 다재다능함에 감탄하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호기심까지 충족되니 더 후한 평가를 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본업이 따로 있고 글을 잘 쓰는 모든 작가의 작품에 호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총, 균, 쇠'의 한국어판 특별서문을 읽다가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자신과 한국의 인연을 읊는데 피아노 연주자로서 종종 협연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한국인이라며 그 사람들이랑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C 장조, 슈베르트의 소나티나를 협연하기도 했다고 한 부분에서 책을 딱 덮어 버렸다. "뭐야, 이과머리 갖고 태어나서 하바드 나왔는데 글도 잘 쓰고 피아노까지 잘 쳐? 비호감이네."


      이렇게 서론이 긴 이유는 오지은 작가가 혹시 이 글을 본다면 스위스에 사는 한 독자가 어떻게 그의 책을 만나게 되었는지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지은은 책에서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냉소로 폄하되는 산문의 가치를 옹호한다. 그는 평소에 모르는 사람의 신변잡기적인 블로그를 즐겨 본다고 한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청년이 도착 날에 편의점에서 무슨 빵과 무슨 음료수를 어떤 기분으로 샀는지를 시시콜콜 적어두는 그런 블로그 말이다. 처음 핸드폰과 통장을 개통하러 갔을 때의 긴장감, 한동한 살게 될 동네의 특색 없지만 괜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골목, 조금씩 생기는 친구, 그들과의 첫 술자리, 들떠 보이는 단체 셀카, 아르바이트 구하기, 일하다 급하게 주방에서 먹는 점심밥... 이런 포스팅들 끝에 점점 그쪽의 생활에 적응해 블로그를 멀리하게 되어 포스팅이 뜸해지고 성의 없어지는 부분까지도 그런 블로그의 '완성'이라고 보고 흥미로워한다. 사실 그가 너무 쿨한 예술가여서 자기 이름이나 자기가 쓴 책을 인터넷에 검색해 볼 것 같지 않아 이 글을 못 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책에서 수시로 주장했듯 적당히 지질하고 적당히 구차하고 무척 솔직한 사람이어서 혹시라도 자기 이름과 책명을 검색해 보다가 이 글을 마주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조금 해 본다. 만약 그렇다면 진정한 힙과 쿨의 '완성'이다.


      오지은의 글들이 좋았던 이유는 술술 읽히는 문장과 유머, 솔직함, 메시지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 좋은 글이구나 생각했던 이유는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그녀의 글에 응답하는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몇 번이나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좋은 술이 그다음 잔을 부르듯 좋은 글은 읽는 사람에게 없던 추억을 강제 생성시켜 주고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 내주고 영감을 주며 모니터 앞으로 달려가 타자를 치게 만든다.


      가령 그가 무대에 서기 전 느끼는 감정과 관객을 대하는 태도, 좋은 무대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기술한 글을 보며 잠깐 잊고 있었던, 얼마 전 휴가지에서 본 공연이 떠올랐다. 한 섬의 가족 단위 숙박객이 많은 리조트에 일주일을 묵었는데 저녁마다 이런저런 공연들을 리조트 내에서 볼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불쇼, 또 어느 날 저녁은 마술쇼, 다음 날은 라틴댄스 쇼... 물론 이런 곳에서 보는 공연답게 불쇼는 어설프고 마술은 진부하고 댄서들은 라틴댄스라면서 왜인지 모르겠지만 비욘세 음악을 틀어 놓고 한국의 웬만한 댄스 경연 참가자보다 못한 춤사위를 선보였지만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해풍과 칵테일에 취한 어른들, 오래간만에 단 것을 제한받지 않고 맘껏 먹고 있는 어린이들에게는 100점짜리 공연이었다. 마지막 날인 금요일 밤 공연은 뮤지컬 '시카고'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그냥 흑인음악 장르의 노래를 솔로가수가 부르는 형식이었는데 불쇼나 마술쇼에 비해 어린이 관객들의 취향이 아니어서 그런지 관객석이 많이 비어 있었다. 게다가 음향까지 말썽이라 계속 삐이- 하는 소음이 나서 그나마 있던 관객들도 귀를 막고 떠나 버렸다. 이러면 마음 약한 나는 더더욱 떠날 수 없다. 열심히 손뼉 치고 호응하는 내 앞에 흥이 많은 한 아기가 있어서 미소를 자아내는 막춤을 춘다. 이제 이 가수는 우리 쪽만 바라보며 비욘세의 'Listen, '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 같은 노래들을 부른다. 이 공연에서 나는 예술이란 무엇이고 감동은 어떻게 자아내는 것일까에 관해 생각했다.


      자기 눈앞에서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열창해야 하는 가수의 심정은 어떨까. 어떻게 마인드컨트롤을 하면서 그 노래에 끝까지 집중할까. 관객들은 참 가차 없고 냉정하구나. 예술로 누군가를 감동시킨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비욘세였으면 아무리 음향이 엉망이어도 관객이 자리를 떠났을까? 목 상태가 안 좋아서 수백 번 삑사리가 나는 비욘세여도 '괜찮아 괜찮아' 응원하면서 계속 듣고 있지 않았을까. 예전에 조슈아 벨이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1713년에 제작된 명품 바이올린을 들고 워싱턴의 지하철역에서 연주했는데 멈춰 서서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감상한 사람은 7명뿐이었고 받은 돈도 32달러 17센트에 불과했다는 실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같은 사람의 연주를 콘서트홀의 좋은 자리에서 들으려면 적어도 100달러 이상은 지불해야 할 것이고 거기서는 기침 소리 한 번 못 내고 참으면서 꼼짝없이 1시간씩 앉아 있는 고문을 기꺼이 즐길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다. 음악가의 이름값, 장소, 음향 상태와 같은 외부적 요인, 관객의 수준을 뛰어넘는 재능과 진심을 갖고 있어 길 가던 사람도 돌아보게 만들고 주저앉히는 그런 아티스트의 이야기는 만화 속에만 나오는 걸까. 아니, 어쩌면 가수는 이 무대를 관객이 없어 초라하고 음향 때문에 망한 무대였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몇 명의 마음이라도 움직여서 그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고 한 아기가 쉼 없이 뱅글뱅글 춤을 췄고 한 아줌마가 감흥에 젖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무대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노래를 불렀고 무대가 끝난 후엔 어떤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잊고 있던 질문의 답을 오지은의 글을 읽으며 어렴풋이 얻은 것 같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섭외가 왔다. 큰 방송국에서 하는 리허설은 처음이었다. 관객이 없는 객석은 환하고 생경했다. 그리고 내 앞에 커다랗고 시커먼 카메라가 세 대 있었다. 정가운데, 왼쪽, 오른쪽.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때 알았다. 내가 앞으로 보게 될 것은 무대의 맞은편, 그러니까 노려보는 듯한 저 빨간 불과 컴컴한 객석이구나. 무대에 서는 것은 영롱한 비눗방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시뻘건 얼굴로 비눗방울을 불어내는 것이었다. 터지면 다음 비눗방울을, 또 다음 비눗방울을, 상황이 허락할 때까지.

  (중략)    

      뮤지션은 자신의 방에서, 연습실에서, 공연장에서 성장한다. 무대에는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요소가 많다. 예를 들어 처음 가보는 공간이라면 소리가 어떤 식으로 울리는지, 저음이 강조되는지, 또는 깎이는지 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몰입하는 방법도 찾아야 한다. 스스로의 긴장을 푸는 법도, 관객의 긴장을 푸는 법도 익혀야 한다. 어떻게 해야 첫 음을 내는 순간 사람들이 음악에 빠질 수 있을지, 다른 세상에 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천재 뮤지션이라고 해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상상과 실제는 많이 다르니까.

      어떤 뮤지션들은 클럽에서 그 훈련을 시작한다. 어색한 멘트를 하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첫 음을 내기 전에 몇 초 정도 쉬면 좋은지 등을 배운다. 박수가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때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면 좋은 지도 배운다. 그리고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웠을 때 관객의 눈을 보는 것이 어떤 일인지, 라이브 그러니까 사라지는 현재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게 된다.
(오지은 '소원을 이룬 다음 날 살아가기' 중에서)

       오지은의 산문 중에서 또 다른 응답하고 싶은 글은 '꼰대에 관한 고찰'이었다. 외국에 살다 보니 여기 사람들은 서로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조언을 주고받거나 오지랖을 부리지 않아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꼰대인가, 갸우뚱할 때가 있다. 오히려 어떤 연령대에 이른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개인적 특성일 수도 있는데 '꼰대라서 그래'로 싸잡아 놀리는 작태가 구태의연하고 더 꼰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내가 꼰대라서 그런가?


      내가 어렸을 적 농구대잔치의 최고 스타 연세대 농구부 선수들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은퇴하고 나서 계획을 묻는 질문에 서장훈이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이라고 대답한 걸 잊을 수 없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꼰대스러움을 장착한 모범생답게 국가대표 감독이나 모교의 코치가 되어 후배를 양성하겠다는 모범답안으로 대답하지 않은 이 스타 농구선수의 당돌함과 개성, 이미 쌓아 놓은 명성이나 커리어를 지키는 것 따위에 초연한 쿨함에 놀랐다. 무릇 장래희망이란 대통령이 되어 남북통일을 이루거나 UN사무총장이 되어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거나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수상하고 싶다, 정도의 스케일이어야 하지 않나. 물론 나는 어렸을 적에도 노벨상은 너무 흔하고 다른 애들은 그게 뭔지 모르니까 퓰리처상을 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엣지 정도는 있는 야망 어린이였지만. 세월이 지나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리고 싶다던 X세대의 대표주자 서장훈은 방송인이 되어 선녀보살 분장을 하고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하는 냉정하고 깔끔한 아저씨가 되어 있다.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을 작은 장래희망으로 생각하고 코웃음 쳤던 야망 어린이는 아이스크림 가게 차릴 돈이 있으면 부자 아니냐고 부러워하는 아줌마가 되어 있다. 퓰리처상은 뭔가요, 먹는 건가요.  


      꼰대의 반대말은 '참어른'이 아닐까. 누군가가 말했다. "어떤 자리에 가게 되면 계산만 하고 빨리 사라져야 참어른이지." 음,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내 노하우를 나누려고 해 봐야, 시대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들은 나눠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내 안에 쌓여버린 환멸과 피로는 아직 낙관적인 그들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존경하는 모 선배가 나와 친구들이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 홀연히 나타나서 봉투를 주고 사라진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 금액에 우선 놀랐고, 왜 언니는 우리와 놀지 않고 황급히 사라졌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한때의 루키는 금방 선배가 된다. 허공에 자주 다짐한다. 앞으로 나도 돈만 내고 일어나야지. 돌아가는 길에 보이면 맨홀에 뿅 하고 들어가서 지하 세계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아야지. 한(恨)은 혼자 간직하고 풀어놓지 말아야지. 고성방가 하지 말아야지. 그러다가도 '앨범을 만드는 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무 고생했어요' 이런 인터뷰를 보면 또 마음이 복잡해진다. 참어른 되기 어렵네.
(오지은 '꼰대에 대한 고찰' 중에서)

      이 책에는 예술가와 무대, 꼰대에 대한 고찰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응답하고 싶고 맞장구치고 싶고 별로 관련은 없지만 기억 속에서 꺼내어 한 마디 덧붙이고 싶고 울고 싶고 웃고 싶은 대목이 아주 많다. 그리고 그 대목은 읽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미라클 모닝, 인문학의 위기, 성별 갈등, 혐오, 우울증, 인종차별 등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거의 모든 화제를 총망라한 글 목차에서 공감할 부분 하나쯤 찾기란 어렵지 않을 거다. 게다가 씨네 21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다듬은 것인 만큼 이런 화제들을 자연스럽게 다양한 미디어 (넷플릭스 시리즈, 영화, 책)와 연결시켜 풀어나가기에 이 책을 읽고 나면 몰랐지만 엄청 재미있고 좋을 게 분명한 작품들과 알았지만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작품들의 이름을 잔뜩 알게 되는 덤까지 얻을 수 있다. 내 취향이 아닐 거라는 선입견으로 지나친 최근의 할리우드 블락버스터 '블랙위도우'나 '로건'을 봐야겠다. 그리고 전미도서상을 받은 소설가 앤드루 솔로몬의 에세이 '한낮의 우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에서 주는 상에 후보로 올랐다는 작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도 읽지 않았지만 먼저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자기 발견을 향한 피아노 연습'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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