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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Apr 05. 2022

강퍅한 나 자신과 어떻게든 살아가기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아다니면서 나의 기도 제목은 바뀌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세요'에서 '내가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로. 어떻게 해도 외롭고, 어떻게 해도 양에 차게 내 외로움을 달래 줄 만큼 한가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을 고쳐 먹은 게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쩔 수 없이 좋은 사람이 되어 버렸지 뭐야'라고 변명하는 장면이 꽤 겸손해 보이면서도 쿨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할 날이 올까 내심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과거의 나에 비해 많이 개과천선한 것 같아 뿌듯할 때도 있는데 얼마 전 지인과의 대화 속에서 충격을 받는 일이 있었다. 다음 주에 뭐해,라고 가볍게 물어보았는데 타 주로 가서 집에 없을 것 같다고 하길래 어디 여행 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자기 친구가 고향인 남아공에 가서 일을 볼 동안 친구네 애들 봐주러 일주일 이상 자기 집을 비운다는 거다. 자기도 자식들이 있고 남편도 있고 바쁜데 가까운 동네도 아니라 비행기 타고 먼 도시에 가서 남의 집 애들을 봐주는 막중한 임무를 대신해 준다니... 그녀의 우정의 깊이에 놀랐다. 남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할 수 있을 만큼'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게 영리한 것처럼,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며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관계만 보아 오다가 자기의 편의를 포기하면서 친구를 돕는 S를 보니 신선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친구 애들 봐주러 일주일 동안 가 있을 거야' 담담하게 언급하는 S야말로 바로 내가 그토록 바랐던 무심한 듯 툭, 선행 흘리기의 경지에 이미 다다른 것 아닐까.


 스위스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애를 혼자 키우다 보니 가끔 단 한 명의 도움이 절실할 때가 있다. 애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눈이 뒤집혀 토를 하는데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르고, 마침 남편이 출장을 갔고, 택시는 신생아 카시트가 없다고 승차를 거부해서 자지러지는 애를 업고 트램을 타고 응급실에 갔던 기억. 응급 진료가 끝난 후 너무 늦은 밤이 되어서 트램이 오는 시간 간격이 길어져 마냥 정거장에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이 없어서 내 겉옷으로 애만 둘러싸고 나는 비를 맞으며 이를 악물고 빗속을 걸었던 기억. 그럴 때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급할 때 친정 엄마나 동네 친구들, 도우미 이모한테 부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그런 기억이 있으니 S가 친구 애들을 봐주는 게 얼마나 친구에게 큰 의미일지 가늠할 수 있어서 더욱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이렇게 자신이 그어 놓은 한계선에서 한 발자국 더 넘어가서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남이 꼭 필요한 도움을 절실한 때에 주는 S를 존경하게 된 그즈음에 취리히에 있는 K에게 연락이 왔다. 주말에 가족끼리 같이 만나기로 했는데 아이가 아파서 아무래도 만날 수 없을 것 같단다. 우리 아이와 남편이 동시에 코로나에 걸려 두 환자를 뒤치다꺼리하느라 나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지만 더 힘들고 지쳤던 격리 기간 동안 K가 밥 한 끼라도 덜 하고 쉬라고 이것저것 한국 반찬을 해서 가져다준 적이 있다. 취리히에서 바젤까지 그 먼 거리를 운전해서 가져다준 성의가 고마워서 장조림이며 육개장이며 싹싹 비웠다. 그녀가 가져다준 용기들을 채워서 돌려줄 겸 주말에 만나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하필 아이가 아프다니... 이미 피클도 담그고 내가 먹을 때보다 더 정성을 들여 돼지갈비를 쟀고 (강판에 양파를 갈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손가락까지 갈아 버렸다) 한국에서 부쳐 준 귀한 진미채와 직접 짠 참기름으로 진미채 볶음까지 만들었는데 이것들을 전해 주지 못해 아쉽다고 하니 '먹은 걸로 칠게요' 하는 그녀의 대답이 돌아온다. 먹지도 않았는데 먹은 걸로 치는 건 내 사전에 없다. 먹고 배가 불러야 먹은 거지! 아, 어쩌지?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르는데... 고민 끝에 K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차 타고 가 볼게요. 취리히 역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젤에서 취리히까지 한국 반찬 배달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비가 와서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냄새가 날까 봐 비닐봉지로 싸고 또 싸서 무거운 반찬 보따리를 들고 차라리 돈으로 주는 게 더 합리적인 도움일 것 같은 왕복 기차비를 지불하고 그날따라 연착이 되어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취리히행 TGV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마치 이 날을 위해 내가 안 읽고 기다렸던 것 같은 일본 영화감독의 에세이를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인증 사진까지 찍고 나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어쩌면 이건 내가 드디어 좋은 사람이 된 순간을 기록한 사진일지 모른다.

 

 그러나 좋은 사람에서 위선자로 추락하기까지의 시간은 찰나였다.


 방역도 아닌 덴탈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연신 기침을 하며 열차 안으로 들어온 몸집이 큰 중년 사내가 멀리 갈 것도 없다는 듯 들어오자마자 정해진 자리처럼 내 앞에 털썩 앉았다. 그 많고 많은 빈자리를 두고 왜 하필 내 앞이란 말인가. 보통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 보고 앉는 게 본능적으로 불편해서 대각선 방향에 앉게 마련인데 어찌하여 이 사람은 본능마저 거스르고 바로 앞에 앉아 내 얼굴에 대고 거친 숨을 내뿜는가. 온 신경이 곤두서서 인증 사진까지 찍은 책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바로 자리를 옮겨 버리면 그 사람이 자기가 싫어서 간다고 불쾌해할까 봐 자리를 옮기는 것도 망설여졌다. 내가 배려심이 깊은 사람도 아닌데 외국에 살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한국에 사는 흑인들이 가끔 지하철 안에서 자기 옆자리만 비어 있거나 사람들이 앉아 있다가도 옮겨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얘기를 방송에 나와서 하면 나 또한 그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서 공감했었다. 파리에서는 내가 관광객인 줄 알고 옆자리에 앉아 뭘 훔쳐 가려는 집시들에 스트레스받고, 바젤에서는 만원 트램 안에 내 옆자리만 비어 있어서 상처받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리 냄새나고 불편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대중교통 안에서 주변에 있어도 참고 견디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이었다. 코시국에 턱스크 빌런 앞자리라니! 그래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길 수 있는 타이밍을 계산했다. 이따가 표 검사를 하러 차장이 올 테니 그때 표를 가방에서 찾느라 부산 떨며 일어난 김에 열차 진행 역방향이 아닌 정방향 자리를 찾아 옮긴다는 듯이 옮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 놈의 TGV가 프랑스 기차라 그런지 차장이 일을 안 하네. 표 검사를 하러 안 온다. 미치겠다. 바젤에서 취리히까지 한 시간이면 가는데 30분이 넘도록 차장이 오지 않아서 드디어 자리 옮기기를 포기하고 그때부터 행복 회로 비슷한 걸 머릿속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가래 끓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이건 코로나가 아니라 그냥 이 사람의 지병 때문에 하는 기침일 거야. 배도 엄청 나오고 손도 덜덜 떠는 걸 보면 건강이 안 좋아 보이네. 코로나 걸린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마른기침을 하는 사람인가 봐. 그래, 이 사람 침방울을 정통으로 한 시간째 맞고 있지만 괜찮아!'


 그러나 나는 코로나 걸린 아이와 껴안고 얼굴 비비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지지고 볶고 다 했지만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슈퍼 우성 유전자의 소유자라고, 내가 바로 인류의 희망이라고 주변에 자랑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기차 안에서 읽은  '고독한 직업' 일본의 영화감독 니시카와 미와가  에세이다. 영화를 사랑해서 영화 일을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능함과 마주해야 했다. 현장의 풋내기일  너무  몰라서 맛보게 되는 좌절감, 조금 명성을 얻어도 여전히 돈을 버는 길과는 무관한 생활인으로서의 무능함, 겨우 숙달된  업계의 베테랑이 되었다 느끼는 순간 불현듯 찾아오는 무력함.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신입 시절 현장에서 꾸중받던 그날처럼 그녀의 귀에는 불호령 소리가 들린다. “무능한 녀석!"

  귀에는 이런 꾸지람이 들렸다. " 강퍅한 녀석!" 아직도 남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전전긍긍하고 오만가지가  불편한 까다로운 녀석 같으니. 나름의 선행에 뿌듯해하던 바로  순간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위선이 까발려지다니  무슨 삶의 잔인한 농담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는 커리어 하이 순간에 자신의 불안과 나약함을 만천하에 생중계한 배우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부끄럽게 만들다니,  너무하십니다.


 취리히 중앙역에 내려 14번 플랫폼에서 K를 만났다. 차도 없이 기차 타고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고, 반찬통도 무거울 텐데 빗길에 들고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냐고, 정말 고맙다고,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강퍅한 사람입니다..."

내 건너편에 바로 그 기침하는 사내가 앉아 있다. 나의 강퍅함을 알려 준 이여, 부디 건강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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