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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Feb 08. 2022

세상에서 자기 일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

 살면서 특색 있는 사람, 절대 잊히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나는 아직 세상에서 제일 키가 큰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다. 사실 한국에서 제일 키가 큰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부자는커녕 입이 떡 벌어지는 대저택에 사는 재벌 정도의 부자도 본 적이 없다. 엄청난 사기꾼도, 세상에서 제일가는 결벽증 환자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욕쟁이도 본 적이 없다. 그럭저럭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 역시 평범한 필녀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임팩트 없는 삶, 논-인플루언서의 삶을 사는 중이다. 그런데 드디어 만났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나는 세상에서 자기 일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다.


 독일은 EU 국가이고 스위스는 아니어서 독일과 스위스 사이 국경에는 세관 사무실이 있다. 스위스의 살인적인 물가를 피해 독일로 주말에 장 보러 가는 스위스 사람들이 많아서 토요일 국경의 세관은 북적거린다. 스위스보다 훨씬 저렴한 장바구니 물가에 50유로 이상 쇼핑을 하면 면세 혜택까지 더해지니 조금 귀찮더라도 세관에서 영수증에 도장을 꼭 받아 그다음 번 쇼핑에서 할인을 받으려고 한다. 충분히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일도 아직은 사람이 일일이 하는 경우가 많은 유럽답게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 주는 일도 사람이 하고 있다. 면세 도장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아마 이 일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영수증을 내미는 모든 사람에게 비록 심드렁하게나마 '구텐 탁' 인사를 건네고 도장을 찍는 세관 공무원을 만나면 고마웠다. 아무리 형식적이어도 인간에 대하여, 자신의 일에 대하여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사람을 본 것 같아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정말로 온몸으로 이 일에 넌더리를 내고 있는 세관원을 만났다.


 여권과 영수증을 찾아 내밀었는데도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여기가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거기가 확실히 맞는 창구였다. '헬로? 할로? 구텐 탁? 엔슐디궁? 익스큐즈 미?' 각국의 언어로 그의 주위를 환기하려 노력했지만 그는 전혀 대답이 없었고 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제발 이 미련한 동양 여자가 포기하고 떠나 버리길, 그래서 본인이 또 한 번 무거운 도장을 들어 이 망할 흰색 영수증 위에 찍는 무의미한 행위를 안 해도 되길 바라는 듯했다. 유리창을 가운데 두고 그와 내가 대치하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주차장에 있던 남편이 전화를 걸어 뭐 하는 거냐고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 있냐고, 도장만 받고 금방 오면 될 일인데 독일 세관이 아니라 스위스 세관에 가 있는 거 아니냐고 나를 의심한다. 억울한 내가 '아니, 나 지금 여기 독일 세관 쪽에 맞게 서 있는데 무슨 경우인지 담당자가 아예 나를 무시하고 상대를 안 해 줘...' 이렇게 통화를 하며 울상이 되는 것을 보고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타향살이하며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대접 많이 받아 봤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투명인간 취급당한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화를 끊고도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여기서 더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말을 건넬 용기도, 그렇다고 떠나 버릴 결단력도 없어서 그냥 서 있었다.


 결국 그는 할 수 없이 나지막이 독일어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자그마한 안경을 들어 끼더니 내 영수증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도장을 안 찍어 줘서 몇 푼의 세금이라도 돌려받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를 징벌할 셈이었던 것 같다.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떠나지 않은 나에 대한 분노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일을 하고 있었다.


 민머리. 움푹 꺼진 볼. 매부리코 끝에 위태롭게 걸친 작은 안경알. 눈동자 없이 싱크홀처럼 박힌 눈. 좁고 구부정한 어깨. 온몸으로 뿜어 내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 시지프스의 돌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도장 찍기라는 형벌에 저항도, 순응도 못한 자의 분노.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 속 인물과 닮은 모습이었지만 '절규'와는 달리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자기 자신과 타인과 자신이 하는 일 모두를 부정하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더 처참했다.

뭉크 '절규'

 한참 꼼꼼하게 영수증을 살피더니 영수증 두 장에는 느릿느릿, 그러나 충분히 신경질적으로 쾅 내리치며 도장을 찍었지만 마지막 한 장은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왜 여기에는 도장을 찍어 주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고, 그냥 안 된다고도 하지 않았고, 욕설이든 뭐든 나에게 대꾸하는 기력조차 아깝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저리 꺼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너무나 모멸적인 순간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이 현실이라는 걸 믿을 수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앞으로 살면서 이보다 더 자기가 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반복적이고 무의미하고 지겨운 일상.

 골동품처럼 주저앉아 먼지가 쌓여 가고 있는 시간.

 지긋지긋한 사람들.

 변화는 허상일 뿐 이 생에 탈출구는 없다는 회의감과 냉소.

 자신의 불행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잊고 괴물이 되어 버린 모습.

 자기 일을 혐오함으로써 남들도 자기를 혐오하게 만드는 악순환.

 

 국경의 세관 창구가 아니었을 뿐 나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저런 모습이었던 적, 과연 없었을까. 그렇게나 불행하다면 차라리 박차고 일어서서 굶어도 좋으니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하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라고 그는 분개하겠지. 어떤 연유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차라리 절규라도 하기를, 그래서 괴물에서 인간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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