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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Dec 07. 2021

인간 규격

소설 '초급 한국어'를 읽고

 기차를 타고 베른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여행의 목적 그 자체보다는 기차, 비행기 등 이동 수단 안에서 다시 읽고 싶은 책이나 사 두고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을 수 있어서 여행을 좋아한다. 두께도 적당하고 표지도 예쁜 분홍색인 문지혁 작가의 '초급 한국어' 소설을 챙겼다. 바젤 중앙역에서 조금 무리해서 뛰면 탈 수 있었던 아침 기차를 기분 좋게 놓치는 바람에 코코아 파우더를 뿌린 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 쌀쌀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읽기 시작한 책을 베른에 도착하기 전에 기차 안에서 다 끝내 버렸다.


베른 가는 기차 안

 책을 덮고 베른 중앙역에 내려 일을 보러 가기 전 시간이 남는데 뭐라도 먹을까 하고 사방을 둘러본다. 뿌연 하늘, 칙칙한 건물들, 바쁜 사람들, 낯선 번호의 트램들. 얼마 전 한참을 살아도 정이 가지 않는, 마치 기차 정거장처럼 흐릿한 인상으로만 기억되는 도시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지금 그 도시보다 더 낯선 도시에 서 있다. 여행지 같은 일상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해서 더 여행지 같은 곳에서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이 얼마나 이질적으로 보였는지 한 여인이 다가온다. "죽헨 지 에트봐스 베슈팀테스? (Suchen Sie etwas Bestimmtes 뭘 찾고 있으세요?)" 그 여인의 손에는 사인을 받기 위한 명부 같은 것이 들려 있다. 파리에서는 고래나 북극곰을 살리는 환경 운동에 동참하라며 서명을 해 달라고 다가온 후 관광객이 정신이 팔려 있으면 뒤에서 한 패거리인 집시가 다가와 소매치기를 하는데 베른에서는 도대체 나에게 뭘 팔아먹으려는 건지, 뭘 훔치려는 건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여기서 길을 잃지도 않았는데도 길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다. 내가 아무리 스위스에 오래 산 사람인 척해도 그들은 귀신같이 안다. 베른 중앙역 광장을 지나는 수많은 스위스인들 속에서 이 사회에 녹아들지 못한 어리숙한 이방인 하나를 골라내서 친절을 가장한 함정을 파는 게 그들의 업이니까. 내 친구 역시 파리에 거의 10년을 살았는데도 직장이 하필이면 에펠탑 근처라 매일 출퇴근하는 길에 관광객들 대상으로 에펠탑 열쇠고리를 파는 잡상인들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불어로 일하는 게 편해지고 떫은 와인이 좋아지고 치즈를 먹지 않으면 식사를 안 한 것 같고 여름 바캉스 계획을 6개월 전부터 세워도 매일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너는 파리지앙이 아니야'라고 일깨워 주는 순간이.


 소설 '초급 한국어' 속 주인공 지혁도 그랬다. 뉴욕에서 공부를 하고 학생 신분을 벗어나 단기 계약이지만 일도 하게 되고 마침내 영주권도 받을 수 있는 정규직 강사 자리를 제의 받기 직전까지 이르러도 시시때때로 그의 일상에는 '너는 뉴요커가 아니야'라고 일깨워 주는 순간들이 발생한다. 커피숍에서, 교실에서, 카지노에서, 거리에서... 그렇게 현재 매일을 살아가여기에서는 속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데 그가 떠나온 과거의 거기 역시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는 아프고, 어머니를 돌보는 동생은 적대적이며, 여자 친구는 헤어지는 이유가 전적으로 지혁에게 있는 것처럼 '미국은 낮이고 한국은 밤일 때 넌 미래에 가 있고 난 과거에 남겨지는 느낌'이라며 이별을 고한다. 시차를 따지자면 한국이 먼저 밤이 되는 것이라 사실은 그녀가 먼저 미래에 가 있는 건데도... 대학에서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초급 한국어' 강사 지혁은 '안녕하세요'와 같은 아주 일상적이고 기초적인 한국말도 그 뜻이 영어로 직역하면 'Are you in peace (당신은 평화 속에 있습니까)?'가 되어 영화 스타워즈의 캐릭터 요다가 할 법한 대사로 들린다며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통에 깨닫는다. 이제 모국어도 그에게 낯선 언어가 되어 버렸음을.


 베른 중앙역 근처에서 맛집이라도 찾아 들어갈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뜨내기임을 들켜 버린 게 불쾌해서 입맛도 없어져 다시 역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여행자에게 가장 큰 마음의 평화를 주는 그곳,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로컬처럼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은 스타벅스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뜨내기 맞으면서 뜨내기로 보였다고 씩씩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고정관념 속에 나를 박제하지 말아 달라고 발끈하면서도 결국은 남들의 오해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꼴이라니.


술 담배 안 하고 주말에 교회 가는 너 같은 애가 무슨 소설을 쓰냐? 네 글은 <좋은 생각> 같은 잡지에 실리면 딱일 거 같아. <좋은 생각>은 물론 좋은 잡지지만 그 시절 나에게 그 말은 모욕적으로 들렸다. 세상에는 '진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너는 절대 아니야. 나를 모범생이라고, 착하다고, 선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혀 아래에는 그런 말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초급 한국어' pp. 104)

 

 고정관념과 오해. 이것들은 외국에 사는 이방인만 겪는 특별한 불이익이 아니다.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수시로 오해받고 있다. 나의 살아온 이력을 알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확신에 찬 어투로 진단 내린다. '당신은 무척 완벽주의자일 것 같다'거나 '독한 집념, 엄청난 끈기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런 오해를 받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 교정해야 할지 몰라 이 말 저 말 아무 말이나 하다가 결국 입을 다문다. 아니라고, 내가 속한 집단에서는 항상 제일 게으르고 헐렁한 축에 속했다고, 집념도 끈기도 없어서 문제라고 덧붙일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진다. 모범생으로 살아온 지혁의 순탄한 인생에는 예술가의 운명에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할 결핍과 굴곡이 없었을 거라고, 그래서 너 같은 애는 소설 쓸 자격도 없다고 하는 동료들의 술주정이 지혁에게 꽤 오랫동안 상처로 남아 그들의 말처럼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한'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게 만든 채찍이 된 것처럼, 나 역시 사람들의 고정관념처럼 뻔한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무위로 돌아갈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한국에 있을 때 출석했던 교회에서 만든 전도 축제 홍보 영상을 봤다. 짧은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영상에서 한 여자가 아이를 재우면서 성경을 읽고 있다. 플래시백으로 화면이 넘어가면서 그녀가 아이였던 시절이 나온다. 그녀 역시 한때 걷지도 못하는 아이였다가 아장아장 걸음마만 해도 부모에게 칭찬받는 어린이였다가, 교복을 입고 열심히 공부하다가, 졸업을 하고, 면접을 봐서 회사에 들어간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야근을 하고, 늦은 밤 버스 정류장에 연인과 앉아서 평범한 데이트를 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보살피다가 그렇게 자란 아들이 군대를 간다. 어느 날 문득 나이 든 자신을 발견한다. 화면이 바뀌면 그녀는 다시 젊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지만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서 고개를 파묻고 외롭다. 그러다가 '네가 잘난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난 항상 변함없이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이런 메시지를 받고 예수님께 달려가는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보고 줄줄 울다가 깨달았다. 나는 정말 규격에 꼭 들어맞는 인간이구나. 어쩜 나란 인간은... 한 장면도 내 얘기가 아닌 게 없을 정도로 분당에 있는 대형 교회에서 소구 하는 타깃 오디언스에 딱 들어맞지? 대기업 사원증 목에 걸고 야근하던 시절이 그립고, 차 없는 남자와 연애를 해서 결혼하고, 아들이 세 살인데 군대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하는 아줌마가 되어 바쁘게 살다가 외롭고 허무해서 줄줄 울고 있는데 이거 나 보라고 만든 영상 아니야?


 치기 어린 젊은이였을 때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했다. 그의 소설 '인간 실격'은 제목만으로도 나를 사로잡았다. 이렇게 잔인한 세상에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나약한 나 자신을 패전 후의 일본 사회에서 자기 파괴로 치닫는 인간 실격자와 동일시하며 자학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특별한 모자람에 안도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나는 실격될 정도로 두드러지는 아웃라이어가 아니었다. 20세기 대한민국 사회가 정한 '인간 규격'에 꼭 들어맞는 획일화된 인간 군상 중 하나일 뿐, 21세기가 원하는 미래형 인재도, 글로벌 시대의 자유로운 유목민도, 하다못해 실패한 천재도 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뻔한데 스위스에서만 눈에 띈다. 호락호락한 이방인으로서만 존재한다.


 '초급 한국어' 속 지혁은 뉴요커가 될락 말락 하다가 결국 한국에 돌아가기로 한다. 눈앞까지 왔던 풀타임 강사 자리는 날아가고 계약이 종료되면서 합법적으로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신분도 상실하게 된다. 미국이란 나라는 그런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레이스 피리어드 (grace period)'라는 마지막 호의를 베푼다. 회사와의 계약이 종료되고 나서도 불법 체류자가 될 걱정하지 않고 신변을 정리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 허락되는데 '은혜의 기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사실은 외국인 노동자가 소유한 마지막 물건까지도 미국 땅에 다 두고 가라는 무정한 기간이 아닌가 싶다. 지혁은 쓸만한 물건들을 아는 사람에게 주고, 남은 물건들을 중고 사이트에서 팔고, 1만 8000달러에 샀던 차를 8900달러에 중고차 딜러에게 넘겼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처럼 그의 모든 짐이 남대문에서 산 바퀴 달린 검은색 이민 가방 두 개에 모두 들어갈 만큼만 남았다. 나 역시 그랬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으로 들어갈 때 거기 오래 살 줄 알고 고심해서 고른 가구들을 남겨 놓고 급하게 떠나면서 왜 당시 나의 사정에는 과분하게 비싼 침대와 소파를 샀었는지 후회했다. 시카고를 떠날 때도 바쁜 대학원생이라 다림질할 시간이 없어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스팀다리미니 밥을 안 해 먹고살아서 거의 새 것에 가까운 주방 도구 같은 것들을 넘겨받을 사람을 수소문해 건너 건너 아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에게 주고 나니 파리로 가는 슈트케이스 딱 두 개만큼의 잡동사니만 나에게 남았었다.


 오래 산 곳에서 그렇게도 간절하게 타이틀과 신분을 획득하고 싶어 몸부림치다가 빈 손으로 떠나는 신세의 이방인이 과거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면 이제는 반대로 이미 너무 많이 붙어 버린 이름표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모범생, 착한 사람, 선비, 순진하고 찌질하고 좋은 사람, 고생이라고는 안 해 본 사람, 운 좋은 사람... '나는 너를 모른다'던 사회에서 낙하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라고 낙인찍는 사회로 불시착할 때의 당혹감.


 작가는 그런 당혹감을 극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 같고 아주 성공적으로 정체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처음으로 영원히 쓰고 싶다는 느낌을 이 세계 안에서 받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선물이었다고 하는 고백을 읽자니 부럽다. 자기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인 모국어조차 내려놓고 모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낙인에서 자유로워진 한 사람. '너 같은 애가 무슨 소설을 쓰냐'는 비아냥을 '나 같은 애만 쓸 수 있는 소설'로 되갚아 준 사람. 그 사람처럼 나도 서툴고 낯선 초급 인생을 인정하고 나만 쓸 수 있는 뭔가를 쓸 수 있을까?


 "죽헨 지 에트봐스 베슈팀테스? (Suchen Sie etwas Bestimmtes 뭘 찾고 있으세요?)"


 베른 중앙역 광장에서 나를 불러 세운 목소리에 대꾸하고 싶다. 네, 무언가 특별한 걸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찾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베른 쿤스트할레에서 만난 Monika Baer의 작품. 기둥에서 떨어져 나가는 작은 부스러기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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