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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Oct 22. 2021

엊그제 바람이 불었다.

 그저께 밤에는 태풍이 왔다. 안방에 딸린 화장실의 천장에 동그랗게 난 창이 있는데 평소에는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해서 에너지 절약에 도움이 되지만 그제 밤처럼 날씨가 궂으면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며 조금 무섭다. 천창을 내려치는 큰 소리에 한밤중에 깼다가 빗소리인 줄 알고 다시 잠들었지만 알고 보니 바람이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였다. 단단히 박혀서 절대로 부서지지도 떨어져 나가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물질이 어쩌면 깨져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존재에 파장을 일으키는 아침이었다.


 일이 있어 일찍 나가야 하는데 내 사정 따위 알아줄 리 없는 느긋한 세 살배기 손을 잡아 잡아끌며 아이 학교를 향하는 내 발걸음도, 내가 이렇게 힘든데 도와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느라 마음도 분주하다. 골을 내며 걷는데 웬 사내들이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느라 아파트 출입하는 길을 막아 놓아서 잠시 섰다. 밤사이 분 태풍에 아파트 출입구에 선 나무의 가지들이 부러졌고 그냥 두면 위험하기에 바로 치우는 작업 중이었다. 어떤 일을 처리하려면 몇 주 전에 약속하는 게 기본인 스위스에서 이렇게 어떤 일을 바로 해결해 주고 있는 광경이 생경하다. 목소리를 바꿔 갑자기 좋은 엄마처럼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저 위에 나뭇가지가 부러졌네. 보여? 그냥 두면 위험해서 아저씨들이 톱으로 잘라서 치우는 거야. 와,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었길래 나무가 아야 했을까?"


결국 꺾이느라 얼마나 고생 많았니.

 2층짜리 집 높이는 되어 보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가던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기의 흐름에 실컷 얻어 맞고 부러져 꺾였다. 덜렁덜렁 매달린 가지는 마지막 자존심 같지만 그냥 두면 남에게 해를 입히는 무기가 되고 본인의 생존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톱으로 잘라 내는 게 낫다. 상처 입은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만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최근에 알게 된 건데 포도나무 같은 덩굴식물을 키울 때 가지치기와 순지르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나무 입장에서 보면 공격받아 상처 입는 것만 같고 그렇게 필요하다는 과정을 거쳐 종국에 과실을 맺기까지가 너무나 요원해 보이겠지만 상처에 대한 치유는 그 아픈 와중에도 즉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나무는 몰라도 본체 안에 상처에 대한 회복 능력이 있다. 가지가 잘리면 얼마 안 가 수액이 흘러나와 상처를 치유한다, 스스로. 지금 저 나무도 더 오래 끈질기게 버텨 내려면 아무래도 팔을 잘라 내는 게 좋겠지.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안 하는 게 지혜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소수의 인원이 모였을 때는 모임을 주도하고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만남이 끝난 후 곱씹게 된다고, 대부분의 경우 어떤 말을 안 해서 후회가 될 때보다는 '그 말은 하지 말 걸' 하고 후회될 때가 더 많다고, 이런 말을 또 주절주절 혼자 했다. 정적을 참지 못하는 다정 (多情)은 병적인 수준으로 많은데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지혜는 부족해서 계속 수련해야 할지, 아니면 이러니까 나인 건지......


 모임이 끝난 후 트램을 타고 오랜만에 시내에 나갔다. 바젤 시내 대중교통을 제한 없이 탈 수 있는 한 달짜리 교통카드를 10만원 돈을 주고 충전해 놓고 그동안 감기에 걸려서, 귀찮아서, 바빠서, 의욕이 없어서 안 나갔었다. 9월 22일에 충전하고 거의 안 탔는데 어느새 만료일인 10월 21일이었다. 주말에 여행 가서 오랜만에 만날 사람들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샀다. 파리는 모든 게 다 있는데, 프랑스 초콜릿이 더 맛있는데 굳이 여기서 초콜릿을 사 가는 게 좋은 생각인지 확신은 없지만 어쨌든 샀다. 파리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을 생각하니까 카카오가 70% 함유된 씁쓸한 다크 초콜릿을 몇 개 사고 보험용으로 달콤 짭짤한 솔트 앤 캐러멜 밀크 초콜릿도 샀다. 다크 초콜릿을 좋아하는 척하지만 밀크 초콜릿에만 손이 가는 게 나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소금과 캐러멜이 든 다크 초콜릿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건 내가 간 가게에 없었다. 초콜릿은 어쩌면 이다지도 인생과 같은가. 왜 어떤 건 쓰기만 하고 어떤 건 달고도 부드러운가.

  그리고 시내에 딱 하나 있는 한국 마트에 갔다. 한국 사람이면서 왜 생강차를 안 마시냐고, 감기엔 한국 마트에서 파는 생강차가 제일 좋다고 동유럽 출신 지인이 강권을 해서 '그렇지,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생강차를 마셔야지' 하고 생강차를 사러 왔다. 꿀인지 설탕인지에 절인 것, 가루를 물에 타 먹는 것, 티백에 든 것, 아무튼지 생강차라고 쓰여 있는 건 다 장바구니에 넣었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책정된 각종 한국산 생강차를 장바구니 가득 채운 것만으로 이미 오늘 분량에 넘치는 사치를 한 느낌이다. 내가 나를 귀하게 대하는 법을 잊어서 지치는 곳, 지쳐서 남을 귀하게 대하는 법도 잊어버린 곳에서 서로 상처 내다가 삐죽삐죽 솟은 자아가 부러져 운다. 간밤에 분 바람처럼 거칠고 사납게 울다가 아무도 달래 주지 않아 멋쩍게 스스로 울음을 멈춘다. 진하게 탄 뜨끈한 생강차가 수액이 되어 아픈 데가 낫고 새순이 날지도 모른다. 생강차 한 잔에 주술적 효과를 기대하는 게 우스워 문득 눈 들어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를 바라보니 태풍이 몰아친 후 참 맑은 가을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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