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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설 Dec 29. 2022

기록 - Prologue.

2020년 9월 22일, 부모님과 포옹은커녕 악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훈련소로 몸을 돌렸다. 첫날에 그 사실이 너무 비참하고 슬퍼 울었다. 다음날 아침에 나온 사과, 어머니가 가져다주던 사과가 생각났다. 나는 그것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숨을 쉬듯 발생하는 일종의 일상의 일환이 되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모든 모습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동시에 가슴을 가득 채운 회의감, 나는 여기서, 어째서, 왜. 모든 자유와 꿈을 포기하고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지. 아버지는 건강하게 태어나줘서 고맙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래, 내가 숨을 쉬고 나를 키운 이 땅을 위해서라면 나는 나의 팔을 내어줄 수 있지.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강제적으로, 타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언제나 고민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러나 답을 내리기 전에 전역 날짜는 찾아왔고, 나는 이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내가 위병소 밖을 나온 2022년 2월, 겨울과 봄이 마주치고 이제 자리를 비켜야 하는 겨울이 극성을 부리며 과격하게 날씨가 추워졌던 시기였다. 타인의 의지로 들어와, 타인의 지시로 나간다. 결국 나는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위병소 문을 나왔다. 과거 문 밖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막연히 기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저 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나는 단언했었다. 그러나 이상의 봄은 무너지고 현실의 겨울이 내 얼굴을 잡고 피하고자 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하였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초라했다. 문제와 질문은 많지만 답을 내리지 못한 비참한 얼굴, 자기혐오의 원인. 끝은 새로운 시작, 그 시작을 위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버려졌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낸 군대, 그 끝과 함께 찾아온 행복의 시간은 1분, 위병소를 나가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는 시간. 그러나 그 이후는.


이 불안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가, 이 허무와 공허함,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근원을 제거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의 근원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이 넓은 세계에 유기된 허무함, 명령에 응하는 수동적인 삶에 대한 저항, 그 모든 것이 이 슬픔의 근원이었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알아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뿌리가 너무 깊고 넓게 뻗어 아무리 당겨도 빠지지 않는 탓에, 나무를 잘라내려 내리쳐도 부러지는 것은 내 손. 이 무렵 겨울은 내 체온과 유사한 온도와 함께 내 목을 졸랐다. 나는 변화도 느끼지 못한 채,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나의 내면 깊은 곳까지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 성격이었다. 설령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 아래 쌓인 사체들을 함께 제거해줄 이들은 없을뿐더러, 함께 해준다고 약속했던 이들은 전부 악취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났다. 줄곧 혼자 남겨졌고, 이에 익숙해지고 이에 맞춰 움직이고 발버둥 치며 살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악취와 무거움 탓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시기에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눈 나의 오랜 친구. 그 친구는 나에게 자신의 깊은 내면을 보여주었고,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 친구가 가진 세계는 나의 세계와 비슷했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표면적 세계가 아닌, 진짜 나의 세계의 모습과.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 또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으리. 나는 언제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됐다.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이 친구에게는 전부 말해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의 답은 간단하지만 매우 큰 용기가 필요했다. 친구는 나에게 병원을 가보라고 말했다.


대답을 듣고,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한다는 사실을 그 친구도 느꼈는지, '어차피 내 말 듣지는 않겠지만'이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지금까지 내가 너를 보며 느낀 거지만, 너는 병원에 가지 않고 혼자 고민하고 극복하려고 하겠지. 좋은 방법이지만 타인의 힘에 의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와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이를 듣고 '겁 많은 네가 어떻게 갈 수 있겠어? 어차피 너는 단 한 번도 내가 말했던 것을 따르지 않았으니, 알아서 잘해봐.'와 같이, 조롱과 무책임하게 던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도발하고, 폄하하고, 무시하는 말이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화를 내듯 병원을 예약했다. 아마 새벽과 아침 사이, 병원이 막 문을 열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약을 마치고, 나는 즐겨 가는 카페에 앉아 출간 원고 작업과 전시회 작품 기획을 조금 진행한 후 운동을 하러 갔다. 그 이후에 잠시 여가를 즐기고 다시 카페로 가 작업과 독서를 했다. 어느새 해는 떨어지고 밤이 되었다. 밤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이미 하늘은 서울의 밤거리와 상반되는 흑색으로 덮어졌다. 친구를 불러 술을 한 잔 할까 생각하며 전화를 걸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이전에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의 내면이 하수구라면, 술은 멈추지 않는 폭우라고. 폭우로 인해 참고 감추었던 본성과 본능, 욕구가 맨홀 뚜껑을 뚫고 뛰쳐나온다고.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편이다. 쉽게 술에 취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금만 술을 마셔도 벽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참았던 본성과 본능, 욕구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의 본성은 슬픔, 그리고 욕구는 고독에서의 해방과 편한 잠. 외롭다는 말을 하며 자주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언제나 옆에 누군가 있기를 바란다고. 그러다가 잠에 빠진다. 아무리 시끄러운 술집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쉽게 잠들고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은 그래서 그런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고민과 고뇌, 후회를 망각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면 이 나의 하루 동안의 노력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원에 가는 게 옳을까, 생각했다. 병원을 감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 등에 대한 문제가 아닌 과연 병원을 간다고 하더라도 과연 내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의 연속이 이어지던 중, 병원 방문 날짜가 다가왔다.


병원은 생각보다 깔끔해 놀랐다. 지금 내가 갔던 어떠한 병원보다 더욱. 안내 데스크 직원들을 웃으며 반겼고, 간단한 설문지를 주었다. 설문지 작성을 마치고, 잠시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생각보다 젊은 여자 의사가 나와 반겨주었고, 진료실로 안내해주었다. 진료실은 병원보다 더욱 깔끔했다. 책꽂이에는 심리학 관련 책이 가득했고, 이름을 아는 몇몇 심리학자의 책도 보였다. 그리고 연세대 졸업증과 심리학 자격증 등등이 보였다. 진료실 내부를 살펴보던 내 모습이 의사의 눈에는 긴장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침묵을 깬 것은 의사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내준 의사에게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의사는 무슨 일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 나는 어차피 후에 보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숨겼던 내 모든 이야기를 다 말했다. 의사는 집중하며 듣고 그에 맞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괴리감을 느꼈다. 상담이 끝무렵에 도달했을 때 그 괴리감의 이유를 알았다. 이전에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의 차이를 본 적이 있다. 범죄 발생 가능성을 제외하고, 이 둘은 모두 감정적 공감 능력 결여 장애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는 유전적 영향, 선천적으로 발생하는 반면, 소시오패스는 후천적으로 발생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의사는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듯했지만,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형식적인 반응, 형식적인 대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약 처방. 나를 멍청하게 만들던 그 약.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던 그 약은 멍청하게 만들어 편하게 잠들 수 있게 하는 약이었다. 상담을 마치고 안내 데스크 직원들은 심화 심리 분석 설문지를 주었고, 그것을 제출하니 직원들은 검사 결과는 다음 방문에 알려주신다고 하며 다음주에 예약을 잡아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다음주에 예약을 잡았지만, 다시 방문할 생각이 없었다.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인형과 대화하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만났던 의사, 내가 방문한 병원은 그랬다. 다른 병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첫 경험 탓에 나는 이 병원이라는 곳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게 2월과 3월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 근원을 불태우지 못했다. 의사가 주었던 약은 3번도 먹지 않고 버렸다. 아마 다시 방문할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변한 것은 없다. 얻은 것이 있다면, 현재 작업 중인 원고를 마친 후, 새로운 소설 주제를 얻었다는 점. 소시오패스 심리학자의 상담일지. 제목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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