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1999, 2017, 2022. 이방인에서 브런치 작가까지.
1999년 9월 10일, 새벽 4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평택의 산부인과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다. 나를 받은 의사는 나를 어머니의 품으로 옮겨주었고, 나의 부모님은 나를 안고 신비로움과 사랑이 섞인 눈빛을 보이며 눈물을 흘렸으리라.
나의 부모님은 바빴다. 자식을 어떻게 전셋집에서 살게 할 수 있느냐고, 그 신념 하나로 맞벌이를 하셨다. 나는 시골에 계시는 친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집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배 밭이,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느티나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00년이나 지난 나무라고 한다. 그곳 전부가 나의 놀이터였고, 나는 산을 뛰어다니고, 밭의 지렁이와 우정을 쌓으며 지냈다. 자연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아름다움을 나는 이른 시기에 경험했다. 나의 유년기는 그랬다.
4살, 이제 곧 5살이 되는 시기에, 월드컵이 지나간 여운이 아직도 감돌던 12월에 새로운 가족이 태어났다. 작고, 아버지를 닮은 얼굴을 한 흰 피부의 동생이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이제 넷이 되었다.
5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도시에 계신 외할머니 댁과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을 오가며 지냈다. 오전에는 할머니 댁, 어머니가 퇴근하실 때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집으로. 평택은 작은 도시다. 도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수준의. 그럼에도 행복했다. 이렇게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행복했다. 외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 허리를 꼭 잡고 시장을 오갔던 그 시간, 숙제하기 싫다고 울먹이는 모습을 달래주던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목소리, 아버지에게 회사 가지 말라고 울며 소리치니 나를 사랑과 함께 애틋하게 쳐다보셨던 아버지의 눈빛. 그 모든 것에 행복이 가득했으리라.
8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나는 또래 애들에 비해 체구가 작고, 겁이 많았다. 아무렇지 않게 예방 접종 주사를 맞은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울면서 맞기 싫다고 소리치며 족히 10분은 넘게 의사 선생님과 실랑이를 했다. 그런 모습 때문일까,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했다. 따돌림, 그 비슷한 무언가. 사랑 가득한 나의 세계에 처음으로 혐오라는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탄생했다. 세계는 약한 자를 지켜주는 것이 아닌, 약한 자는 도태된 인간, 가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는 그 어떠한 것으로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 행했고 느낀 감정이니, 이것이 인간이 타고난 본능이렷다. 어쩌면 이 시기부터 강박적으로 사랑을 원했을 수도. 그리고 무시당하는 것이 두려워 내 모습을 숨겨야만 했다. 변화는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이자 인간이 가진 최후의 방어 기제이다. 오늘 나의 존재는 주체에서 내일 객체가 되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전부 등지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큰 고통을 유발한다. 나는 8살에 그것을 겪었다.
정확한 기억하지 않지만, 아마 이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시기에 죽음을 목격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암이었다. 나는 그 시기에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어린 나이에 간 장례식장은 나에게 새로운 공간, 신비한 공간이었다. 모두 같은 색의 옷을 입고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외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울고 계셨다. 어머니는 저 멀리 앉아 고개를 가리고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어머니에게 나는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다.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 할아버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아직도 병원에 계신 거냐고. 나는 이때 어머니가 했던 말을 이제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죽었다고 했다. 죽었다는 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제 평생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야 나는 그 장소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절망, 절망한 표정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9살, 갑작스레 부쩍 살이 많이 쪘다. 맞는 바지가 없어 언제나 고무줄 바지만 입어야 했다. 그때 나의 모습은 가히 최악이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고 땀을 흘리는 모습은 나 자신이 생각해도 역겨운 수준이었다. 그런 모습에도 사랑으로 보듬어준 가족에게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좋아해 주는 친구들은 없었고, 그 누구도 나에게는 수업 끝나고 축구하러 가자고, 놀이터에 가서 놀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울며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남아있다. 하지만 점점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익숙해지며 혼자 노는 법,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다. 내면에 쌓인 화를 참지 못하고 동생에게 화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 시기의 모든 나의 행동을 나는 지금도 반성한다.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성장이 좀 빨랐다. 1년 후, 살이 급격히 빠지며 키가 빠르게 컸다. 그때부터 또래 친구들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같이 놀러 가자고 물어보며, 동시에 나를 무서워했다. 이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혐오스러웠던 과거의 모습,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것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친구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나에게 말을 걸어준 그 친구들은 1년 전 나를 무시하고 폄하하던 그 친구들. 그런 그들이 나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살았다. 하루하루, 언제나 배움의 연속을 보내며. 그것에 긍정적, 부정적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배움이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신기하고 감사했다. 그러다 당시 나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12살, 나는 원래 다니던 학교를 떠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친해진 친구들과 정든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 사실이 슬펐지만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하나의 탄생은 하나의 죽음을 뜻하며, 하나와 다른 하나, 그 둘을 전부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러니 짧게 인사를 하고 나는 나왔다. 다시 보자는 말도, 보고 싶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행복했다는 말은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학교에서도 나는 특별한, 어쩌면 특이한 존재였다. 전학생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또래에 비해 큰 키와 몸, 낮은 목소리까지. 나는 반에서 주목받는 아이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원래 다니던 학교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과거의 학교는 약간의 주름이 있는 백지라고 말한다면 새로운 학교는 글자가 가득해 흰 공간이 보이지 않는 구겨진 종이와 같았다. 정신이 성숙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지, 혹은 미숙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먹을 칠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칠한 먹을 지워내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쉽게 물들었다. 나에게 손찌검을 하면 하지 말라고 짜증 섞인 웃음을 던지며 말을 하던 나는 작은 손짓에도 화를 내게 되었고, 시비를 거는 친구들의 어투를 참지 못하고 싸우기도 했다. 전학을 오기 전, 원래 학교에서는 중상위권 성적에 머물렀던 나는 새로운 학교에서 최상위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 되었다. 반에서 2등에서 3등을 유지하던, 그런 학생이었다. 학업적 성적은 좋아도 정신적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했다.
평택에는 4개의 중학교가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졸업한 중학교를 가라고 권유했고, 나는 그곳을 1 지망으로 적은 후 입학했다. 그곳에서 과거 전학을 가며 떠났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반가운 짧은 인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반으로 돌아왔다. 나는 5반이었는데, 반배치고사에서 5등을 해서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말해주셨다. 그러니, 그때 당시에 나는 반에서 1위의 성적을 가졌던 것이다. 선생님들은 나에게 주목했고, 나는 그 주목과 관심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모든 선생님들의 기대와는 달리 1 학기 중간고사, 최초의 시험에서 최악의 성적으로 답했다. 부모님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독학을 연습하라며 학원을 보내지 않으셨었다. 하지만 성적표를 보고 나를 학원으로 끌고 가셨다. 이것은 나의 인생 최고이자 최악의 경험의 시발점이 되었다.
처음 학원에 간 날, 나는 그곳에 원래 다니던 친구들과 맨 뒷자리에 앉았다. 영어 수업이었다. 앞에는 한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원은 휴대폰 제출이라는 구시대적 규칙이 있었다. 그러나 내 앞자리 여자아이는 가방에 버젓이 휴대폰을 꽂아두었고,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는 이것으로 그 아이를 놀렸다. 선생님에게 말할 거라며. 그러자 그 친구가 뒤를 돌아봤고,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예쁘다는 감정을 넘어서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낄 정도로 예쁜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고,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 여자아이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 계절은 분명히 봄이렷다.
학원을 다니며 자연스레 그 친구와 번호를 교환하고 연락을 주고받다, 결국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학원에는 또 다른 구시대적 규칙이 있었다. 학원 내 연애 금지. 학원의 분위기를 해치고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를 그런 규칙 따위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했고, 그녀도 그것을 알았다. 아마 그녀도 그러했겠지. 결국 선생님들도 연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래라면 퇴원이 규칙이지만, 학원에 등록하고 2개월 뒤에 본 기말고사에서 기존보다 평균 성적을 20점이나 올린 나를 내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그래서 학원은 퇴원이 아닌 압박을 주어 이별을 유도했고, 이는 정확하게 통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헤어지자고 말했고, 나는 수긍하며 알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끝냈으면 더 좋았을까, 하지만 나는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이별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다시 찾아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많이 좋아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시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습이었다. 학원 내에서는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야만 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방법이니. 그러나 그 나이의 아이들이 숨긴다고 얼마나 가려질까, 선생님들은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쉽사리 알게 되었고, 다시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이런 식으로 이별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유독 영어에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래서 영어 선생님은 나를 매우 좋아하고 챙겨줬으며, 그런 영어 선생님에게 감사했고 의지했다. 나는 그 선생님께 말했다.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해서 만나고 싶다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고. 그에 증명하듯 기존보다 더 좋은 성적표를 가져왔다. 그때야 학원에서도 인정해주었다. 우리는 학원 내에서 공개적으로 연애하고 퇴원당하지 않은 최초의 연인이 되었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함께 보냈다. 우리에게는 그 셋 모두 봄이었지만. 그러나 무심코 찾아온 가을을 대비하지 못했다. 사랑이 식었다. 아니, 나는 언제나 타오르고 있었지만, 사랑이 식었다. 혹은 다 날아갔나. 결국 그녀는 그 어떠한 압박과 상황 때문이 아닌, 사랑이 식었다는 이유로 이별을 말했다. 나는 울며 밤을 새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남 뒤에는 운명적으로 이별이 따라온다고 그랬다. 나는 그때부터 운명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고, 거부하고자 했다. 가을, 나는 가을을 헐벗은 몸으로 보냈다. 그리고 겨울을 맞이했다.
도시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고, 밤에도 불빛이 가득했지만 나의 하늘은 언제나 칠야였다. 크리스마스가 3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뭐하냐며. 죽었던 나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만나서 하고 싶지만 만나서는 말하지 못하겠다며, 전화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자로 미안했다고, 미안하다고, 혹시 다시 만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만남의 마지막 문장을 비극으로 이끌 선택을 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 감탄과 환희에 쌓일 겨를도 없이, 나는 회의감에 뒤덮였다.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왜 이별을 고해야 했으며, 이별한 그 밤 내가 흘렸던 눈물과 지새운 밤의 의미는 무엇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 사랑 자체에 회의감을 느꼈다. 진짜 사랑으로 만나는 것인가, 혹은 미련인가. 나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만난 우리의 시간은 계절 하나를 넘기지 못했다. 겨울에 만나, 봄이 도착하며 우리는 이별했다. 이별을 말하는 입을 보며 나는 그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 미련이었구나, 부정하고 부정했지만 이미 오랜 시간 전에 내 사랑은 식었구나,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욱 마음이 편할 것만 같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하는 법, 그리고 사랑 자체가 아직도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14살부터 시작한 나의 사랑은 15살에 마침표를 찍었고, 이것이 내가 한 마지막 사랑이 되었다. 현재까지.
시간 들여 고민할 시간도 없이 인생에 큰 변화가 왔다. 유학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해외로 나가게 된 탓이다. 낯선 나라 멕시코로 나는 떠났다. 2014년 10월 18일에 한국에서 출발해 2018년 10월 18일에 멕시코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언어와 처음 보는 피부색의 사람들이 가득한 곳, 모든 것이 신기했다. 작은 정원이 있는 2층 주택, 내 방은 원래 살던 집의 거실보다 넓었다. 그런 곳에서 지냈다. 호화로운 시간을 보내리라 짐작했다.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영어와 스페인어 둘 중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양인은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었고, 나는 숱한 놀림을 버텨야만 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도 알아듣지 못한 척, 화나도 웃으며 괜찮은 척. 나는 나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위해 공부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다시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는 멕시코라는 나라를 넘어 미국의 여러 도시를 다녀왔다. 여러 세계를 오가며 세상을 배웠다. 새로운 인간을 만나며 인간을 배웠다. 나는 멕시코에서 보냈던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배움과 함께 찾아온 고통의 무게는 팔을 뽑을 듯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다시 그것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지금도 책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지만, 2017년, 과거의 나는 책을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책 보다 흥미로운 일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숙제로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오라 했을 때 다른 과제보다 더욱 싫어했다. 억지로 읽은 1984, 하지만 내용이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지, 싶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1984라는 책을 읽어보았냐고 물었다. 당연히, 거의 20년에서 30년 전에 읽으셨다고 했다. 동시에 아버지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어보라고 주셨다. 아직도 그 첫 문장을 읽었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문득,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2017년 4월 16일, 혹은 17일, 일요일이었고 하늘에서는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나는 거실에 앉아 첫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Writer's Box라는 이름으로. 주제는 지금까지 배운 모든 지식, 회고록과 회상록.
글을 쓰겠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놀람과 동시에 조롱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배우러 해외에 가서 무슨 한국어로 갑자기 글을 쓰느냐고. 어차피 곧 질려서 포기할 것 같다며, 혹시 잘 보이고 싶은 여자가 있느냐고, 중2병이 왔느냐며 놀리고 무시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이. 그래서 책을 썼다. 거짓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또한 내 10대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었다. 그렇게 2017년 6월 12일, 첫 책 'Writer's Box'가 세상에 탄생했다.
책을 출간한 이후, 여러 문학 집단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중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예술 엔터테인먼트라고 자칭하는 곳이었다.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나의 모든 활동을 지원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뭔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2017년 10월 23일, 두 번째 책 '푸른 태양을 그리워하는 달'을 출간했다.
자만했다. 문학에 재능이 있다며 자만했다. 당시에 나는 내가 최고라 생각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1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과 예술 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2018년,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지원했다. 나는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당연히 떨어졌다. 확신했던 탓일까, 나는 절망했다.
2018년은 나의 인생에 있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한 해였다. 예술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은 지원을 위한 수수료라며 일정 금액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고, 그 돈은 다른 곳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거기에 대학교 입시가 겹치며 나는 그 돈에 대한 환급만 요구하고 나왔다. 그 돈보다 입시가 더 중요했으니. 해외에서 보낸 후 한국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는 사실은 쉽지 않았다. 귀국한 날 바로 시차 적응할 시간도 없이 학원을 가야 했고, 나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14시간의 시차를 맞췄다. 과도한 카페인 섭취로 기절했던 적도 있다. 내 모든 것을 쏟아 준비한 입시, 그러나 나는 그 어떤 학교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것을 위해 나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돈을 썼는가, 완전히 무너졌다.
추가합격을 기다리며 나는 다시 학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주변의 시선. 재외국민이 어떻게 대학에 다 떨어질 수 있냐는 그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무겁고 날카로운 시선, 나는 그 시선에서 숨기 위해 화장실에서 하루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10월이었다. 화장실에 덩그러니 놓인 고독한 녹슨 면도날과 눈을 마주쳤고, 나는 그것으로 내 몸에 상처를 냈다. 그때야 비로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상처가 생긴 팔을 가리며 공부했다. 공부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운명은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나. 12월 21일, 나는 미리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2019년, 대학 생활에서 크게 기억에 남는 배움은 없다. 이 배움은 학업적 배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친 후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전시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나에게 발생하는 수익은 전혀 없다고 하니 괜찮다고 하셨다. 필명도 바꿨다. 이때부터 나는 하설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군대에 있으면서 여러 전시회에 참여했고, 전역 후에는 또 새로운 전시회에 참여하고 신간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5일, 2018년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횟수를 도전한 끝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1999년부터 2022년, 내 인생은 언제나 배움의 연속이었다. 비극적이기도 했으며, 낭만적이기도 했던 이 사건의 연속에서 나는 언제나 배움을 얻었다. 이는 방황하기 때문이라고, 목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들은 하나의 지점으로 모여 나의 문학이 되었다. 예술은 인생을 닮았고, 인생은 예술을 담았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예술이 되며, 예술은 곧 인생이 된다.
나의 인생은 이방인과 같았다. 언제나 어떠한 지점을 지향하고, 방황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아마 현재부터 먼 미래까지도 그러하리라. 언제나 이렇게 방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 나는 그렇겠지.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인생이었을 수도, 그러한 인생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마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겠지. 언제나 새로운 곳과 새로운 것을 을 원하고, 바라며, 방황하며.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유일하게 원하는 것 하나가 있다면, 나 눈감고 떠난 후에, 누군가 나의 인생을 읽었을 때 내 인생 마지막 줄 마지막 문장 옆에 이렇게 적어주기를 바란다.
"예술과 함께 사망한 이방인."
나의 인생이 타인의 예술이 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하게 바란다. 내 인생이 가진 마지막 목적, 목표, 지향.
나 눈 감아도 나는 나의 모든 문장 속 살아 숨 쉬니, 나는 존재한다. 문장은 진실만을 전한다. 이는 진실이 된다.
아, 마지막 하나 바람이 있다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예술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기소개서,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