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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설 Nov 04. 2022

왜 쓰고, 어떻게 쓰는가.

문장 창작에 대하여.

2017년 4월 16일, 혹은 17일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글을 쓰고, 그 기간 동안 두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과분하지만 여러 번의 전시회에도 참여했다. 이것만으로 글을 잘 쓴다는, 그런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이 좁은 대한민국에도 나보다 단어를 더욱 잘 다루는 사람들은 훨씬 많으며, 애초에 글이란 잘 쓴다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 글의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좋은 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모순적이지만 그러하다. 가령, 큐비즘으로 유명한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을 예로 들겠다. 그 그림을 처음 선보였을 때 피카소는 정신병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현존하는 미술 작품 중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예술에 정답이란 없다. 그것은 문학도 포함이다. 피 섞인 나의 혈연, 나의 부모,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전부 각기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 모든 시선에 맞는 문장을 쓴다, 그것은 불가하다. 그러니, 나 자신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좋은 문장이 된다.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며, 그저 평가와 평론을 거부하는 합리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문장을 쓰는 행위 자체를 몸은 반작용적으로 거부하게 될 것이며, 자신감 없는 글이야말로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나쁜 글이 된다. 즉, 이 글의 결론은 우선 쓰고, 자신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만족할 수 있는 문장이 완성될 때까지 수정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내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글을 쓰며 배우고 느낀 글을 쓰는 이유와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예술에는 정답이 없으며, 이 글도 정답이 아니다. 그저, 타인보다 조금 더 많은 경험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의견일 뿐.


지난 글에서 내가 문학을 시작한 이유에 관해 간략히 설명했다. 혹여 읽지 않았다면 그것을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한다. 앞으로 나의 모든 작품을 읽을 때 이해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나의 글을 읽고 글을 어떻게 잘 쓰느냐고 묻는 독자가 있다. 그것에 매우 감사하다. 나의 글을 끝까지 정독했으며, 내가 문장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뜻이니. 하지만, 나는 이러한 질문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이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으신 것이냐'라고 묻지만, 대부분 '잘 모르겠다'라고 하거나, '잘 써서 나쁠 건 없지 않으냐'라는 식으로 답한다.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최대한 타인의 기분과 감정 상태를 해치지 않는 선으로 돌려 말하는 화법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이유를 가지고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글을 쓰는 이유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만큼 글을 쓸 때 중요한 것도 없다. 내가 글을 왜 쓰고, 왜 써야만 하는지, 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면 그 이유는 곧 글의 목적성이 되고, 목적성은 내용이 되며, 내용은 문체가 된다. 나의 경우를 예시로 들겠다. 나는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매우 부족함이 많은 삶이었다. 그것을 표출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즉,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삶의 회의감과 이상적 관계와 세계'가 되며, 이는 현재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인 '현실과 이상의 대립, 그리고 그 사이의 타협과 괴리'와 직결된다. 문장 작성의 이유 설정, 이는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은 각자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다. 편지를 쓸 때를 생각해보라. 편지를 왜 쓰는가? 지금까지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진실되게 전하기 위해. 확실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목적이 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문체가 만들어진다.


당연하지만, 글을 쓸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 글을 써야 하는 명분이 생겨 쓸 것이다. 그러나, 그 명분은 타인이, 혹은 상황이 만들어준 이유일 뿐, 나의 이유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편지로 숨겨두었던 나의 마음을 전한다, 이런 구시대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 즉, 여기서 말하는 이유에는 '글이, 문장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추가로 포함된다. 이것이 문학을 하고자 하거나, 혹을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큰 진입장벽이다. 수많은 문인들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의문과 직면하고는 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왜 쓰는가'와는 결이 다른 의문이다. 위의 의문은 내가 어째서 글을 쓰고 싶은가에 대한 의문이라면, 이 의문은 문장이 아니더라도 나의 생각, 사상,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이다. 이 의문을 지금까지 명확하게 답변한 자는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인간의 역사는 기록부터 시작되었다. 기록은 문자가 되었고, 문자는 단어가 되어 문장이 되었고, 문장은 문학이 되었다. 즉 문학, 기록이란 인간의 역사의 시작점이자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쓰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할 수 없는 생명이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에.


즉, 문장을 쓰기 전에 '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문장을 '왜' 쓰고 싶으며, 나는 '왜' 문장이 아니면 안 되는가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전자의 질문은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평생 답을 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스승은 문학이란 자연과 세계,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나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마음에는 사랑만이 가득한가?

혐오, 회의, 허무 등,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한 사람의 내면일 터. 그것에 대해 고뇌하고, 그 고뇌를 문장으로 승화하는 것 또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고뇌 가득한 문장은 분명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예술일 터. 이를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장을 왜 쓰고 싶은가, 그것만 정했다면 문장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장을 쓰는 모든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이다.


문장을 왜 쓰는지 정했고, 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면 안 되는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책임감 없는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일단 쓰라고 말한다. 정말 책임감 없는 말이지만,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직접적 경험과 간접적 경험을 알 것이다. 둘 중 후자가 전자에 비해 훨씬 빠르게 잊힌다고 한다. 이유는 사용하는 감각의 개수에서 비롯된다. 직접 경험은 대개 오감 전부를 사용한다. 그에 반해 간접 경험은 많아야 세 개의 감각, 청각, 시각, 청각을 사용한다.


많은 이들이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유명한 작가 한 명을 정해 그의 글을 많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당연히, 매우 좋은 방법이다.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더욱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따라오는 결과 때문에 이 방식을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글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 문체를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게 되며, 그처럼 쓸 수 있게 된다는 것. 글에 니체가, 카뮈가, 오웰이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그에 가려질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냐는 것이다. 어떻게 나만의 글을 쓰는가? 일단 적어야 한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고, 알 수도 없다. 가면을 벗지 않으면 얼굴을 알 수 없다. 펜을 놓은 손은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우선, 써야 한다. 그 전에는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어떠한 말을 해줄 수 없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았으면 당신은 나를 알지 못했겠지. 나도 그렇다. 당신이 쓰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이 있다. 문인은 영감과 상상력이 넘쳐 언제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편견임이 분명하다. 글을 쓰는 모든 이는, 아마 그러하지 않은 이들과 상상력 부분에서 조금 높거나 같다. 혹은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 경우에 속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는가?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직결된다. 문인은 영감을 기다리지 않는다. 단순히 영감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며 무언가 머리에 떠올랐을 때만 글을 쓴다면 아마 그 문인은 일생에 10편의 작품도 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것이다. 단순히 영감이 떠올라서 쓰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바람, 후회, 고뇌, 그 모든 것을 적을 수 있어야 한다. 우연히 지나친 인물의 착장을 보며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지나친 바람을 마시며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펜촉이 마른 듯 어떠한 단어를 쓰지 못하고 종이를 찢었던 적이 많다. 힘겹게 단어를 골라 문장을 써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선으로 그은 횟수는 셀 수 없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몇 시간을 고민한 적이 있고, 한 문단을 쓰기 위해 밤을 지새운 적도,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기도 했다. 글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완성된다. 나는 언제나 말한다. 문학은 선천적 재능이 아닌 후천적 재능으로 발현한다고. 문학의 시작은 경험과 지식, 이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그러니,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말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니 말이 없는 자는 죽은 자와 같다. 우리는 살아있다. 살아있으니 말을 해야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존재의 유를 증명한다.


사실, 글을 왜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하고 명쾌한 답을 할 수 없다. 그 누구를 데려온다 하더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신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다. 실존하는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펜을 잡는다고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이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그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문장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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