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지설 Dec 24. 2023

팀장님, 공황이 심해져서요. 연차를 써도 될까요?

원칙-실행의 간극 (principle-implementation gap)

"팀장님, 제가 공황이 심해서요. 내일 급하게 연차를 좀 써도 될까요?"

"제가 최근에 우울감이 좀 심해져서 수면에 문제가 생겨서요. 다음 주에 며칠 좀 쉬어도 될까요?"'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쉽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 상상해보곤 합니다.


이제 90%가 넘는 미국인들이 능력만 있다면 인종과 상관없이 거주지를 정하고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등의 권칙'에 동의한다. 하지만 실제 그 사회가 평등한지는 다른 문제이다. '원칙-실행의 간극(principle-implementation gap)'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흑인이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집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으면 95%가 넘는 사람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지만, 집주인이 상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집을 팔지 않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찬성하는지 몰으면 65%만이 "그렇다"라고 답한다. 주거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인종차별 금지 원칙에 찬성하는 것과,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정책을 지지하는 것 사이에는 대부분 30% 가량의 차이가 존재한다.

김승섭,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동아시아, 68-69p, 데이비드 윌리엄스(하버드 대학교 보건대학원 사회행동학과) 교수 인터뷰 中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원칙-실행'의 간극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22년 『인권의식실태조사』에 따르면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태도'에 관한 설문에서 94.4%의 시민이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고 인권침해나 차별을 하지 않는 것' 이라고 응답했습니다. 81.2%는 다른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나의 일상생활이 불편해지더라도 감수하는 것이라고 응답했지요. '인권보호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인식'에 관한 질문에는 63.3%의 국민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소외되지 않는 사회'라고 응답했습니다.


하지만 국립정신건강센터가 발간한 『2021년 국민 정신건강 지식 및 태도 조사 결과보고서』를 살펴보면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에 대한 설문에서 '정신질환자와 결혼하여 가족이 될 의향이 없다 81.0%', '이웃으로 갈 의향이 없다 67.7%', '업무상 가깝게 지낼 의향이 없다 52.1%', '친목 모임을 가질 의향이 없다 51.1%', '친구로 지낼 의향이 없다 49.7%'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사실 '원칙-실행'의 간극은 멀리 가지 않고 제 자신을 살펴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팀장이라면, 부하 직원이 "팀장님, 제가 공황장애라 다음 주 며칠만 병가를 써도 될까요?"라고 물을 때 아무런 편견 없이 "그래요, 편하게 쉬고 돌아와요."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내가 동의하는 사회와 실천하는 사회에는 그 간격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고 인권침해나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태도라고 응답한 94.4%의 우리나라의 국민이 거짓 응답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많은 국민이 차별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느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원칙-실헹'의 간극이 줄어들 수 있을까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직접 말을 하기 시작하면 훨씬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낙인을 줄이려는 교육이나 캠페인에 돈을 쓰기보다는, 정신질환자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정신질환자 당사자가 직접 "나도 똑같은 사람이고, 바로 이 자리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도와야한다...정신질환 역시 당사자가 사회에 나오고 존재를 드러내야 낙인을 줄일 수 있다.

김승섭,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동아시아, 89-90p, 패트릭 코리건(일라노이 공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인터뷰 中


최근 서울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올해 5억 2000만 원의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지원 예산을 내년 2억 7000만 원으로 약 50%를 일방적으로 삭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50% 이상을 정신질환 당사자를 고용하고 있으며 서울 내 3개 센터는 58%, 80%, 80% 비율로 정신질환 당사자가 근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센터는 정신질환 당사자의 역량을 강화하고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질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노력해온 단체이지요.


그리고 일방적인 서울시의회의 결정에 반대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온 정신질환 당사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 인해 서울시의회는 12월 15일 본회의에서 예산 삭감 결정을 철회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이들을 위해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위인까지는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원칙-실행'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중에 하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이처럼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이 담긴 기사와 부정적인 시선이 느껴질 때 잠시 멈추어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모여갈 때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조금씩 나아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는 직장에서 편하게 "팀장님, 제가 공황이 좀 심해져서 다음주에 연차 좀 쓰고 쉬고 올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오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추운 날씨가 조금 풀렸네요,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매거진의 이전글 자존감 공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